2. 十偈讚頌

 

 

第一.  懷胎守護恩

 
頌曰1)


累劫
2)因緣重, 今來託母胎.

月逾生五臟, 七化六精開.

體重如山岳, 動止風災.

羅衣都不掛, 裝鏡惹塵埃.

 

1. 아기를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여러 겁을 거듭한 지중한 인연으로

금생에도 다시와 어머니의 아기집에 몸을 의탁했다네.

달이 지나 머리와 팔, 다리가 생기고

일곱달로 바뀌자 육정이 열렸다네.

몸이 무거워져 남산만해도

행동거지 오히려 실바람조차 겁을 내시네.

비단 옷은 두고도 아니 걸치고

화장대엔 언제나 먼지만 쌓이네.

 

 

1) 송(頌) : 게송(偈頌). 불교에서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 하는 시구의 체재.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나 보살의 덕을 찬미하는데 있어 외우기 쉽게 게구(偈句)로 지어 노래로 부른 경우가 많다. 자세한 것은 여기.
2) 겁(劫) :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라는 뜻이다. 자세한 것은 여기.

오랜 겁을 거친 인연으로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머님의 몸에 의탁해 이 몸이 생기게 된 인연과, 처음 이 몸을 잉태하셨을 때의 어머님의 행동거지에 대해 말씀하셨다.『능엄경』에 의하면 사랑이 흘러 種이 되고, 뜻이 받아져 태가 되는 것인데, 부모에게 이미 삼업(三業-몸, 입,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 있고,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마침내 태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 안에서 오음(五陰)이 몸을 이룬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처음 아이를 잉태했을 때 비단 옷을 걸치지 않고, 몸단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이가 태어나 교만하거나, 사치스럽거나, 겉치래만 번지르르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第二.  臨産受苦恩

頌曰

懷經十個月, 産難將欲臨.

朝朝如重病, 日日似惛1)沈.

2)3)難成記. 愁淚滿胸襟.

含悲告親族, 惟懼死來侵.

 

2. 아기를 해산할 때 수고하신 은혜.


아기를 잉태하여 열달 지나니

해산의 어려움이 다가오네.

아침마다 무거운 병에 걸린 것만 같고

나날이 정신도 희미해지네.

그 두려움을 어이다 기억하리?!

근심스런 눈물 가슴 가득 옷깃을 적시네.

슬픔을 머금고 친족에게 하는 말

"오직 죽음이 찾아올까 겁이 납니다."

 

1) 惛 : 어리석다. 정신이 흐릿하다. 어지럽다. 음은 ‘혼’

2) 惶 : 두려워하다. 음은 ‘황’

3) 怖 : 두려워하다. 음은 ‘포’

분만에 임했을 때의 심리상태와, 두려움을 말씀하셨다. 지금의 어머니들도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분만실에 들어서면서 과연 내가 살아서 다시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까?.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

第三.  生子忘憂恩


頌曰

慈母生君
1)日, 五臟總開張.

身心俱悶絶, 流血似屠羊.

生已聞兒健, 歡喜倍加常.

喜定悲還至, 痛苦徹心腸.

 

 

3.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어주신 은혜.


자애로운 어머니 그대를 낳시던 날

오장이 온통 뒤집히고 틀어졌다네.

몸과 마음 모두 기진맥진 까무러쳤고

피는 흘러 마치 양羊을 도살한 것 같았지.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고 건강하단 말 듣고선

그 기쁨 평소보다 몇배나 되었는지?!

기쁨이 가라앉자 다시 슬픔 찾아오고

아픔은 심장을 꿰뚧는다네.

 

1) 君 : 그대. 2 인칭.

아기를 나을 때의 고통과 아기를 낳고 난 다음의 서글픔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런대 어째서 아기를 낳고 나서 아기가 건강하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 했다가 다시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새로운 생명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힘들며, 대견스러운 일이다. 또한 내 몸 속에서 태어난 아기는 어찌 보면 또하나의 ‘나’ 일 수 있다. 그러므로 아기를 낳는다는 일은 무엇보다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부모가 아기를 낳으면 생각이 아기를 낳은 그 순간에 멈추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이 세상에 나오면 그 순간부터 아기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며,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의 고해를 건너야 한다. 이러한 부분이 불교다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第四.  咽苦吐甘恩

頌曰

父母恩深重, 恩憐
1)無失時.

吐甘無所食, 咽苦不顰2)眉.

愛重情難忍, 恩深復倍悲.

但令孩兒飽, 慈母不辭饑.

 

 

4. 쓴 것을 삼키시고, 단 것은 뱉어서 자식에게 먹여주신 은혜.

 

부모님의 은혜 깊고도 중하니

사랑하고 어여뻐하심 한 때도 잊을 수 없네.

단 것 토하시어 잡숫지 않고 자식에게 모두 주시고

쓴 것 삼키셔도 눈 섭 한 번 찡그리지 않으셨다네.

사랑이 무거울수록 정은 참기 어렵고

은혜가 깊을수록 슬픔 배가 된다네.

오직 아기를 배불릴 수만 있다면

굶주림도 마다않던 자애로운 어머니.

 

1) 憐 :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생각하다. 어여삐 여기다. 사랑하다. 음은 ‘련(연)’

2) 顰 : 찡그리다. 이맛살을 찌푸리다. 음은 ‘빈’

  오직 자식을 위해 희생하시는 어머님의 은혜를 말씀하셨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님은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어떠한 고통도 참고 견디신다.

   그런데 “사랑이 무거울수록 정을 참기 어렵고, 은혜가 깊을 수록 슬픔이 배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불교 용어중에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다. 인연이 있어 만난 것은 언젠가는 여의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소중한 관계라도 한 번 만나게 되면 반드시 이별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만남이란 헤어짐의 시작으로서 늦든 빠르든 간에 언제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헤어짐의 정황은 천차만별이다. 빨리 헤어지고 싶은 관계가 있는가하면, 덤덤한 헤어짐, 아픈 이별이 있다. 이별이 아픈 까닭은 그만큼 정이 깊기 때문이다. 서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이 들지 않은 사이라면 헤어짐이 그다지 가슴아프지 않다. 하지만 만남이 오래되고 정이 깊이 들 수록 그 헤어짐이란 몹시 가슴아프다. 그 이별이 아무리 잠깐사이라 하더라도 헤어지기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비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뿐만이 아니라 잠시 내가 보유하던 물건과의 헤어짐에도 사람들은 가슴아파한다.

   가령 서로 남남인 두 남녀가 우연히 한 공간에 같이 있게 되었다고 하자. 처음 그들 사이에 아무런 감정이 싹트지 않고, 아무런 관계가 아닐땐 서로 만나고 헤어짐이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들 두 남녀 사이에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일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성숙해갈수록 이 둘은 잠시의 헤어짐에도 서로 아쉬워한다. 사랑이 깊을 수록 아쉬운 감정 역시 깊어간다. 이 아쉬워하는 마음, 헤어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애착’이다. 애착이 강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괴로움이 생긴다. 강한 애착은 소유욕을 낳는다. 그러나 아무리 애착이 강하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면 또 괴롭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여의는 괴로움인 ‘애별이고(愛別離苦)’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所求不得苦)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이러한 괴로움은 부모 자식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사랑에의 집착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식들은 영원히 부모님께서 자신을 사랑해 주실거라 믿고, 부모 역시 영원히 자식을 사랑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램일뿐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이다.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리 부모자식간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별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사랑이 깊을수록 그 정은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며, 은혜가 깊을 수록 슬픔이 갑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이나 여의는 괴로움은 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모두 집착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집착의 중심은 갈애(渴愛)이다. 특히나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있지만 갈애는 결국 모두 충족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항상 고뇌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 집착을 번뇌 또는 무명(無明)이라 하여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 情 역시 집착에 의해 생겨나는 번뇌의 일종이다. 따라서 번뇌가 소멸된 상태인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 집착,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켜야 하는데, 이러한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한 방법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이 문장 역시 불교적인 특징이 농후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第五.  迴乾就濕恩


頌曰


母自身俱濕, 將兒移就乾.

兩乳充饑渴, 羅袖1)掩風寒.

恩連恒廢枕, 寵弄2)盡能歡.

但令孩兒穩, 慈母不求安.

 

 

5. 마른자리는 피하시고 젖은 자리에 누우신 은혜.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시고 당신은 진자리에 누우신 은혜)


어머니 몸소 젖은 자리 누우시고

아기만은 언제나 마른자리 누이셨네.

두 가슴의 젓으로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시고

비단 소맷자락으로 찬바람 추위를 가려주셨지.

끝없는 은혜로 언제나 단잠도 폐하시고

사랑스런 재롱만으로도 언제나 기뻐하셨네.

단지 아기만을 편안케 하시고

어머니 편안함을 찾지 않으셨다네.

 

1) 袖 : 옷 소매. 음은 ‘수’.

2) 寵弄 : 사랑스런 재롱. 음은 ‘총롱’.


나실 때 괴에로움 다이즈시고오

기르실 때 밤나즈로 애쓰는 마음.

지인 자리 마른 자리 가라아 뉘시며

소온 바리 다다알 토록 고오오생 하시이네.

하느라래 그무어시 놉따 하리오

어머니메 희이이 생은 가이 업서라.

 

第六.  哺乳養育恩

頌曰

慈母象
1)於地, 嚴父配於天.

覆載恩將等2), 父孃意亦然.

不憎無眼目, 不嫌手足攣3).

誕腹親生子, 終日惜兼憐.

 

6. 젓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


자애로운 어머니 땅과 같다면

엄하신 아버지 하늘에 짝하시네.

덮어주고 실어주는 하늘 땅의 은혜 같듯이

부모님의 은혜 또한 그러하다네.

눈이 없다하여도 미워하지 않으시고

손과 발이 불구여도 싫어하지 않으시네.

내 배 앓아 친히낳은 자식이기에

온 종일 아끼시고 가엾게 여기시네.

 

1) 象 : 본뜨다. 본받다. 음은 ‘상’. 여기서는 ‘같다’라는 의미로 쓰임. 다음 문장의 配역시 ‘짝하다’고 번역 했지만 ‘같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고 할 수 있다.

2) 覆載恩 : 덮어주고 실어주신 은혜.

3) 攣 : 오그라질 ‘련’. 병으로 손, 발 같은 것이 오그라듦.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음(陰)과 양(陽)의 조화에 의해 생겨나고, 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만물을 낳고 성장시키는 음과 양의 성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은 건강하고, 씩씩하며, 외향적인 것으로 꼭 남성다운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음은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내성적인 것으로 꼭 여성다운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음과 양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상으로 양은 하늘, 음은 땅이라고 생각해서, 만물을 낳고 기르는 것을 하늘과 땅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씩씩한 모습을 지닌 하늘을 아버지, 자애롭고 두터운 덕을 지닌 땅은 어머니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마치 하늘이 만물을 낳고, 덮어주며, 땅이 만물을 실어 길러주는 것에 비유하여 覆載恩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늘은 높고 귀한 존재이며, 땅은 낮고 천한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비유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하늘과 땅의 덕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덕에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아무튼 하늘은 만물을 낳는 것, 땅은 그것을 기르는 것, 하늘은 아버지, 땅은 어머니로 부르는 비유로 인해 사람에게 있어서도 우리를 낳아 주신 것은 아버지이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낳아 주신 몸을 사랑과 두터운 덕으로써 길러 주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시경』에서도 “아버지는 내 몸을 나아 주시고, 어머니는 내 몸을 기르셨도다.(父生我身, 母鞠我身)”라고 노해했던 것이다.

  또한 부모가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결같고 또한 무조건 적이다. 자식이 불구거나, 몸에 하자가 있다고 하여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다.

  며칠 전 아내에게서 들은 얘기다. 아내의 후배 하나가 임신 8개월째인데, 병원에서 임신 초기에 기형아 검사를 하라는 권유를 듣고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인 즉 만약 검사를 해서 뱃속의 아기가 기형일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아기는 분명 내 아기이며, 따라서 유산시킬 것이 아니므로 구테여 뱃속의 아기에게 혐오스런 짓을 하고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이며 어머님의 마음이다.

第七.  洗濯不淨恩

頌曰

憶昔
1)美容質, 姿媚甚豊濃.

眉分翠柳色, 兩臉2)奪蓮紅.

恩深摧玉貌, 洗濯損盤龍3).

只爲憐男女, 慈母改顔容4).

 

7. 깨끗하지 않음을 씻어주신 은혜.


예전의 아름답던 그 용모와 자태

예쁘던 그 모습 몹시도 풍만하고 농염하셨지.

아리따운 두 눈섶 버들잎과 같으셨고

발그레한 두 볼 연꽃을 옮긴 듯.

은혜 깊을수록 옥과 같던 그모습 여위시고

더러움을 씻어주시느라 반룡盤龍을 잃으셨네.

오직 아들 딸을 사랑하신 그 훈장은

어머니의 바뀌신 모습이라네.

 

1) 憶昔 : 옛날을 돌이켜 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직역을 하면 ‘옛날에 아름답던 용모와 자태를 돌이켜 보다’가 된다.

2) 臉 : 뺨, 얼굴. 음은 ‘검’.

3) 盤龍 : 반룡경(盤龍鏡). 몸을 서린 용을 주된 무늬로 하는 구리 거울. 한식경(漢式鏡)·당경(唐鏡)과는 구도가 다르다. 용 외에 호랑이를    표현한 것도 있기 때문에 ‘용호경(龍虎鏡)’이라고도 한다. 한식경에서는 중심의 둥근 손잡이 밑으로 용의 몸둥이가 감추어져 있고, 머리    와 미족(尾足)을 손잡이의 상하에 배치한 무늬 모양이 특색을 이룬다. 도상(圖像)의 표현은 반육조식(半肉彫式)이 많지만 세선식(細線    式)도 있다. 4개의 머리를 2개씩 마주 대한 것, 3개의 머리를 같은 방향으로 선회(旋回)한 것, 두 마리를 교차시킨 것, 한 마리만의 것 등    여러 가지이고, 용과 호랑이를 적당하게 배합시키기도 하였으며, 용 또는 호랑이만을 무늬로 한 것 등이 있다. 작은 것은 평연식(平緣式)    이고 대형의 것은 3각형식 4두형(頭型)으로, 후한(後漢)시대부터 위·진(魏晉) 시대에 걸친 것이다. 대형 거울에는 물고기·개구리·물새 따    위를 첨가하기도 하고, 신인(神人)·거마(車馬)의 무늬를 배열한 것도 있다. 당경에서는 한 마리의 서린 용이 거울 뒷면에 크게 표현되어    있다.

4) 只爲憐男女, 慈母改顔容 : 이 문장에서 爲는 ‘하다’ 또는 ‘위하다’ 등의 동사가 아니라 ‘때문에’의 의미를 지니는 부사로 쓰였으며, 憐은    타동사로서 ‘男女’를 목적어로 받는다. 그리고 ‘男女’는 곧 자녀를 의미한다. 다음 문장 역시 ‘改’는 타동사 ‘顔容’은 목적어. 따라서 이 문    장은 직역하면 ‘오기 자식만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자애로운 어머니께서는 얼굴마저도 바뀌셨다.’가 된다.

이 게(偈)에서는 과거 아름답던 어머니의 미색, 용모와 자태마저도 자식 때문에 야위고 상하게 됨을 말씀하셨다. 여성들은 처녀로 있을 때에는 자신의 용모를 아름답게 가꾸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나 일단 자식이 생기고 나면 자식을 돌보느라 자신의 외모를 가꿀 겨를이 없다. 자식의 용모는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주시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는 것이다. 요즘의 여성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한 때 뭇 여성들이 몸매가 망가진다는 이유로 아기에게 모유 수유를 기피한다던가, 몸이 아무런 이상이 없음에도 재왕절개를 통해 아기를 낳는다던가, 심지어는 출산마저 포기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이라 할 수 있다.

 第八.  遠行憶念恩

頌曰

死別誠1)難忘, 生離實悲傷.

子出關山外2), 母意在他鄕.

日夜心相逐, 流淚數千行.

如猿泣愛子, 憶念斷肝腸.

 

8. 자식이 멀리 타향에 가면 걱정해 주시는 은혜


죽어서 하는 이별 참으로 잊기 어렵지만

살아 하는 이별 진실로 슬픈 상처를 남기네.

자식이 집을 떠나 타관으로 나가면

어머니의 마음도 타향에 있지.

낮이나 밤이나 자식 따라 가는 마음

흐르는 눈물 천 갈래 라네

새끼를 사랑하여 우는 원숭이처럼

자식 생각에 애간장이 다 끊어지네.

 

1) 誠 : 진실로, 참으로.

2) 關山 : ①국경이나 주요 지점 주변에 있는 산. ② 변경의 관문. ③ 고향(의 산). 따라서 일반적으로 관산 밖으로 나간다는    말은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3) 원숭이 울음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매우 처량함이나 쓸쓸함을 느끼게하는 요소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과거 漢詩나    한문 문장에서는 쓸쓸함, 적막함, 애처로움, 슬픔 등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원숭이 울음소리’라든가 혹은 ‘원숭이 휘    파람 소리’ 등의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

집을 떠나 타향으로 간 자식 걱정과 그리움에 늘 애태우시는 어머님의 심정을 노래하셨다.

第九.  爲造惡業恩


頌曰

父母江山重
1), 恩深報實難.

子苦願代受, 兒勞母不安.

聞道2)遠行去, 行遊夜臥寒.

男女暫辛苦, 長使母心酸3).

 

 

9. 자식을 위해 악업으로 나아가시는 은혜


강산 같이 무거운 부모님 은혜

그 은혜 깊을수록 보답하기 정말 어렵네.

자식의 괴로움 대신 받기 원하시고

아이의 수고로움 어머님은 펺지 않네.

먼 길을 떠난다는 말만 들어도

행여 밤에 추운 곳에 누울까 걱정하시네.

아들 딸이 잠시만 힘들어해도

오래도록 괴로운 어머니 마음.

 

1) 父母江山重 : 江山重이 父母를 수식하는 문장 구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영어의 문법 식으로 설명하면 ‘父    母’와 ‘江山重’ 사이에 관계대명사나 접속사(which is 혹은 that 등)가 생략된 문장 구조라고 할 수 있다. ‘父母’는 곧 부    모님의 은혜를 가리킨다. 따라서 문장의 주체는 부모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가 곧 강산과 같이 무겁다는 말이다.

2) 道 : 본디 ‘길’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나 여기서는 ‘말하다’의 의미로 스였다. 따라서 ‘聞道~’는 ‘~라(고 하)는 말을 듣    다’의 의미가 된다.

3) 男女暫辛苦, 長使母心酸 : ‘男女’는 子女를 의미한다. 使는 ‘~로 하여금 ~게 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자식이 잠시라도 힘들어하면, (자식이 힘들어하는 사실이) 길이 어머님의 마음으로하여금 괴롭게 한    다’는 뜻이 된다.

   爲造惡業恩을 해석하면 ‘자식을 위해 악업을 행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이는 ‘業’이니 ‘惡業’이니 하는 용어가 우리들의 일상용어로 그리 많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業이란 본디 삼업(三業)-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을 가리키는 말로, 신체·언어·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선악의 행위를 가리킨다. 업(業)은 본래 행위라는 의미였는데, 후에 불교에 채용되어 선악의 행위가 보이지 않는 힘을 일으켜 그 과보(果報)를 갖게 할 때의 그 힘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인간의 일체의 생활활동을 신체에 따른 행위, 언어에 따른 행위, 마음에 따른 행위 등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이를 업의 설과 관련지어 설명한 것이다. 즉 어떤 일을 하려는 의지가 의업, 그것이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업, 언어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구업이다. 이렇게 볼 때, 의업은 심리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신업과 구업은 동기와 결의 등의 심리적 요소와 말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등의 육체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업을 특히 중요하게 여겨 전통적으로 모든 행위의 본질을 사(思)라고 하였다. 사는 의지(意志)를 말하는 것으로 결국 행위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업의 의론이 기계론적이고 숙명론적이 아니라, 의지의 자유와 노력의 결과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누구나 업이 없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불교에서는 업에서 벗어나기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아니면 소멸된 업장으로 다시 나아간다 하더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 偈頌에서는 이 한몸 해탈성불(解脫成佛)의 길에서 벗어난다손 치더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만 기꺼이 다시 업의 굴래에 떨어져도 좋다는 어머님의 자애로운 희생을 노래하신 것이다.

第十.  究竟憐愍恩

頌曰

父母恩深重, 恩憐無歇
1)時.

起坐心相逐, 遠近意相隨.

母年一百歲, 常憂八十兒.

2)知恩愛斷, 命盡始分離3).

 

 

10. 끝까지 어여삐 여기시고 근심해주시는 은혜.


부모님의 은혜 깊고도 중하니

그 은혜 그 사랑 다할 날이 없어라.

일어서나 앉으나 항상 마음 쓰시고

멀거나 가깝거나 자식 향한 그 마음.

어머니 나이 백살이 되어도

언제나 여든 살 난 자식 걱정 하시네.

그 은혜 그 사랑 언제나 끊어질까?

이 목숨 다하면 비로소 끊어질까?

 

1) 歇 : 쉬다, 휴식하다, 비다, 없다, 다하다, 마르다. 음은 ‘헐’.

2) 欲 : 하고자 하다. 음은 ‘욕’.

3) 欲知恩愛斷, 命盡始分離 : 이 문장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은혜와 사랑이 끊어짐을 알고자 한다면, 목숨이 다 하여야     비로소 분리되는 것이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은 이몸이 죽어 없어질 때가지 가이 없음을 노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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