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孟子의 名은 軻이며 字는 子車 도는 子輿라 하였다. 魯의 鄒縣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부모의 성명이 모두 확실하지 못하고, 단지 父를 激(字는 公宜)이라 하며, 母는 장(仉)氏라 하나 분명치 않음. 3세에 아버지를 잃고 孟母의 三遷之敎.斷機之敎등 古事가 전하지만 三歲喪父說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자도 있다. 孟母  氏는 雲龍을 탄 神人이 태산으로 부터 내려온 꿈을 꾸고 孟子를 낳았다고도 한다. 또한 孟子의 生卒年代에 대하여서도 史記에는 기록 이 없고 元의 程復心의 孟子年譜에 의하면 周烈王四年(BC 372)에 태어나 난왕(赧王 BC 289)에 생을 마쳤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享年 84.
   孟子는 子思의 門人에세서 受業하고 孔子를 尊崇하여 私淑하였다. 孟子는 學問을 성취한 후에 濟世救民의 큰 뜻을 품고 諸國을 歷訪하였다. 처음에 鄒에 出仕하여 士가 되고 후에 齊宣王의 客卿이 되었다가 다시 鄒로 돌아 갔다. 그후 宋.薛을 거처  에 가서 文公의 優待를 받았으나  은 國土가  少하고 强國사이에 끼어 있으므로 孟子의 抱負를 실현할만한 나라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혜왕은 禮를 낮추고 幣帛을 후히 하여 천하의 賢士를 초청하여 그 의견을 들으므로써 자국의 敗戰에 대한 雪辱을 기도하였다. 이에 孟子는 梁惠王을 찾아갔으나 서로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후 혜왕은 죽고 襄王이 즉위하였으나 그는 庸暗의 君主로서 善政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孟子는 梁을 떠났다. 魯의 平公은 孟子를 招聘할 뜻을 갖고 있었으나 그의 嬖人 臧倉의 沮害로 말미암아 맹자를 초청하려는 議論은 중지되고 말았다.
   당시는 列强이 爭亂을 일삼고 合從連衡의 說에 귀를 기울이고 부국강병의 術에 마음을 두고 塗炭에 빠져있는 백성의 괴로움에 대하여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으며 孟子가 주장하는 仁義 王道의 說은 迂闊한 空論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孟子는 仕官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門人 萬章의 무리와 함께 詩書를 평론하고 孔子의 뜻을 祖述하여 孟子7篇을 두게 되었다. 이 책은 論語.大學.中庸과 함께 四書의 하나로서 東洋經書中에서 진귀하게 여기는 책이다.
   戰國時代에 孔子의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학자가 孟子이다. 따라서 孟子는 孔子이후 儒學의 정통성을 고수한 일인자로 꼽히게 되었다. 특히 근본사상에 있어서 孟子는 孔子의 仁의 사상을 그대로 충실히 계승한다. 얼핏보면 孔子는 근본 원리로서 仁을 주로 말한데 비하여 맹자는 仁義를 많이 말하였다. 맹자가 인과 더불의 의를 더 말한 사실은 孔子의 사상을 계승하되 자기 나름의 시각에서 계승한 사실을 의미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원래 禮는 생활 규범에 따르는 형식인데 비하여 의는 생활 규범이 될 올바른 내용을 의미한다. 규범상의 외면적 형식과 내면적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맹자는 의를 더 생각함으로써 규범내용을 더 중요시 하였음을 의미하고 예의 근거를 孔子보다 한층 더 파고들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①性善說

   孔子의 仁 사상을 주관적인 측면에서 계승.발전시키면서 이룩한 孟子의 철학이 바로 性善說이다. 孟子의 性善論은 그의 학문의 근본이다. 그는 人性의 善함을 설명함에 있어서 詩書와 先王의 說과 인간의 心理 및 五官이 작용 등을 열거하여 論證하였다. 특히 孟子는 惻隱之心을 곧 사람의 본성이 선량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하여 性善을 두 가지 방면에서 증명하는데, 우선 같은 類의 것은 대개 서로 비슷하다는 연역적 방법으로 마음의 현상에서도 서로 같음을 주장한다. 이 마음의 현상에서 서로 같은 것이 바로 理의 義에 의한 희열감이라고 한다. 즉 理와 義로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에세서는 일치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이 義를 좋아하는 만큼 인간의 性은 善하다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孟子는 겸험내지 귀납적 방법으로 性善을 증명하였는데 그는 성선의 사실을 인간의 심리현상을 들어서 설명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不忍人之心이 잇음을 지적하고 이럴 때 느끼는 惻隱之心과 羞惡之心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仁과 善의 선한 본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즉 孟子는 惻隱之心은 仁의 端緖이고 羞惡之心은 義의 端緖이며, 辭讓之心은 禮의 端緖이고 是非之心은 智의 端緖라고하여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이 四端의 마음이 있으며, 따라서 사람은 다 善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孟子의 性善論은 그 필연적 결과로서 良知良能을 말하게 되었다. 良知良能은 선천적인 것으로서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능한 것은 良能이고,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양지이다. 따라서 惻隱.羞惡.辭讓.是非의 마음은 사람의 良心에 고유한 것이므로 그것들은 良心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性善의 증명을 통해 孟子는 仁義禮智에 입각한 행위를 우리에게 권장했음은 물론이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소질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性이 본래 선한 것이기는 하지만 욕심 때문에 악하게 되었다고 여겨, 러한 욕심을 제거하고 선한 본성을 회복하기위해 양심을 확충하여 실천할 것을 촉구하여 마지 않았다.

②修養論

   孟子는 그의 修養論에 있어 먼저 四端을 확충하면 善의 능력이 강대해져서 物慾의 侵害를 排除하고 훌륭한 賢人君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孟子는 부동심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浩然之氣를 기를 것과 知言의 方法을 말하였는데, 浩然之氣는 그 氣 됨이 至大至剛하여 정직으로써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천지간에 가득 찬다고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길 그 氣는 義와 道를 짝하고 이것은 集義(積善)로써 생기는 것이고 義가 엄습하여 취하여 지는 것은 아니며 자기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 조금이라도 불만족한 것이 있으면 얻어졌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그 마음이 공명정대하여 천지에 부앙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고 부귀가 능히 그 마음을 淫亂하게 할 수 없고, 빈천이 능히 그 지조를 옮길 수 없고, 威武가 능히 그 氣槪를 굽힐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맹자는 養氣와 함께 不動心을 기르는 방법의 하나로 知言의 修養을 하여 他人의 말을 듣고 즉시 그 말의 正邪曲直을 정확히 판단하여 결함을 가려내고 조금도 미혹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맹자는 과욕을 養心의 要諦로 삼고 사람의 본성은 욕망 때문에 枯亡한다고 보아 寡慾욕을 주장하고 慾望의 節制를 역설하였으며 夜氣를 보존하고 放心을 되찿아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고 그 放心을 찿아들이는 것 뿐이라고하여 放心을 찿아 들여서 善한 상태로 회복할 것을 역설 하였다.

③政治論

   孟子의 時代는 戰國의 혼란한 시대였으므로 모든 제도는 해이되고 질서는 문란하여졌다. 제후들은 공벌로서 賢을 삼고, 詐術로써 才를 삼았다. 이런 때에 孟子는 蹶然히 분기하여 先王의 仁義로써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왕도를 부르짓고, 약육강식의 覇道를 배척하였다.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孟子는 仁政을 이상적 정치로 보았다. 그리하여 孟子는 우선 仁政이 德治와 民本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梁惠王과의 대화에서도 王道政治의 이론을 제창하고 군왕들에게 왕도나 인정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능히 자신을 남에게 까지 미쳐가고 일체의 행사에 까지 나타나는 것이 곧 왕도의 정신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맹자는 人君이 먼저 인과 의를 행하고 利를 뒤로하면 군신 상하가 각각 그 지위에 편안하게 되며, 사회질서는 유지되고 백성들과 함께 音樂을 즐기면 人君은 어떠한 호사와 사치를 할 질라도 백성들은 오히려 인군의 音樂을 즐거워 할 것이라고 하였다. 맹자는 또한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하여 人君은 마땅히 不忍人之心으로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경제적인 분야에 있어는 산업을 장려하여 생활을 넉넉히 하도록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양육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고 人君은 백성의 부모라는 심정을 갖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맹자에 의하면 왕도는 경제적 기본 토대가 마련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백성된 자들은 항상된 기본 재산이 있어야 항상된 마음이 유지되기 때문에 경제적 생활토대 없이는 왕도의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경제적 어려움과 불균형이 장기적으로 시정되지 않으면 민심은 흔들리며, 백성들은 정상적인 판단을 잃고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로인하여 도덕과 예의질서는 유명무실해지고, 타락과 혼란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맹자에 있어서 왕도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 도덕의 이행이 그 핵심적 관건이었다. 그리하여 맹자는 구체적인 경제적 토대로서 토지경작과 관련한 "정전법(井田法)"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한편 맹자는 왕권 자체가 일단 天으로부터 주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그 天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므로 결국 民意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맹자는 民意를 배반하고 일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覇道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한 그의 견해가 武王의 伐紂를 당연시하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난다. 즉 군주라는 패도자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방벌의 대상이 되어서 마땅하다는 이론이며, 또한 인군의 과실을 몇번이고 諫하여도 듣지 않으면 人君의 지위를 폐하여도 무방하다고하면서 國家에는 백성이 제일 貴하고, 다음이 社稷이요 군주는 輕하다는 논리로서 국가기본이 백성이라는 民本精神에 의거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군주는 배제하여도 무방하다는 이론인데, 이것은 일종의 혁명을 시인하는 사상임은 물론이다. 그런 까닭에 맹자의 방벌사상은 과거 동양사에서 易姓革命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