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가교, 孔子

공자의 시대와 생애
사람다움과 사람답게 사는 법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다
참교육의 실현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가교

咸 賢 贊

공자의 시대와 생애

 

   공자가 활동했던 시대는 중국 주周나라 중기에서 말기에 해당하는 시대로 이 때 중국의 상황은 유사이래 가장 혼란한 시기로서 이 혼란한 시기를 전후로 나누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하는데,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를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혼란은 경제적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이미 주 산업인 농사에 소를 쓰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된 철이 농기구로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는 고도의 경제 발전을 가져왔으며 아울러 산업의 분화를 활발하게 했다. 그런데 이 같은 경제 발전은 토지를 분배받아 잠시 이용한다는 생각에서 토지를 영원히 소유하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힘이 센 나라들은 더 많은 토지를 차지하려고 하였고, 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사회의 제도와 질서가 심각하게 해체되고 파괴되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가 혼란하면 할수록 그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사상 역시 생겨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시 중국사회에서 춘추시대가 유사이래 가장 혼란했던 사회라고 한다면 이 시대를 바로잡기 위한 위대한 사상가가 출현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이 필연적인 역사적 사실 앞에 출현한 사람이 바로 공자이다.
   공자의 조상은 은殷나라의 후신인 송宋나라의 민공泯公에게서 비롯된다. 민공의 후손 가운데 목금보木金父라는 이가 있었는데, 목금보는 아버지가 송宋나라의 태재에게 피살되자, 노나라로 도망하여 추 라는 마을에 정착하였다. 목금보의 후손 가운데 숙량흘叔梁紇[숙량叔梁은 자字이고 흘紇은 이름]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가 공자의 아버지이다.
   숙량흘에게는 딸 아홉에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그 아들이 자신의 후계자로서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숙량흘은 뒤늦게 안징재顔徵在라는 여자에게서 공자를 얻었다고 한다. 때는 기원전 551년, 주나라 영왕 20년, 노나라 양공 21년, 10월 21일이었다.
   공자는 나이 15세가 되면서 학문에 뜻을 두고 예禮를 배웠으며, 20세가 되어서는 관직에 나아갔다. 공자가 처음 담당한 벼슬은 위리委吏라는 직책으로 주로 창고의 출납을 관리하는 하급관리였는데, 회계가 분명하였다. 그 후 공자는 가축을 기르는 직책인 승전乘田이라는 자리로 관직을 옮겼는데, 공자가 승전의 직책을 맡고 있는 동안 공자가 기르는 가축이 모두 잘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는 소공昭公이 겨우 19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상태였고, 실제적인 정권은 모두 계손季孫 숙손叔孫 맹손孟孫이라고 하는 삼환三桓의 수중에 장악되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공자는 좀 더 안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문에 매진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끝에 35세가 되던 해에 노나라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물산도 풍부한 제나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제나라 역시 공자의 뜻을 펼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이 때부터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나이 40이 되었을 무렵에는 세상의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50이 되었을 무렵엔 학문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파악하게 되었고, 우주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모든 진리와 우주 만물의 근원을 공자는 한마디로 천명天命이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50세에 이 천명을 알았고 실천하게 된 것이다.
   천명을 알게 된 공자는 정치에 뜻을 갖게 된다. 공자는 51세 때 노나라 중도中都라고 하는 고을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공자가 정치를 하자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러자 이를 본 당시 노나라 임금인 정공은 공자에게 일약 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오늘날의 관직으로 보면 내무부장관에 해당되는 직책이었다. 사공의 직책에 있으면서 공자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첫 번째 개혁의 내용은 곧고 정직한 자를 등용하는 일이었다. 공자가 정치개혁을 단행하자 모든 관리의 기강이 바로잡혔다. 그러자 정공은 공자를 사구司寇의 자리에 임명하고 재상으로서의 실권을 부여하였는데, 사구란 오늘날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사구로 임명받은 공자는 사법과 행정, 외교의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노나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노나라가 이와 같이 발전하게 되자 노나라와 이웃하고 있던 제나라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노나라가 부강해져서 패자가 되면 노나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제나라부터 먼저 병합될 것이라고 생각한 제나라는 노나라가 더 이상 부강해지지 못하도록 공자를 노나라에서 떠나게 할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나라는 미인 80명과 악사, 그리고 금옥으로 장식한 말 160필을 함께 노나라의 정공에게 보냈다. 이를 본 정공은 바로 매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공자가 아무리 바로잡아 보려고 하였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다시 노나라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천하의 모든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는 공자의 끝없는 방랑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68세의 나이로 힘든 방랑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공자는 오직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과 저술에 힘썼다. 그리하여 이 때『시경』과『서경』을 정리하였으며, 노나라의 사관들의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진리의 기준으로 심판하여『춘추』라는 책으로 정리하고, 예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했다. 고국에 돌아온 후 공자 나이 71세가 되던 봄 노나라의 서울 곡부 서쪽에 있는 벌판에서 사냥이 있을 때, 숙손씨의 마부인 서상 商이라는 사람이 이상하게 생긴 짐승을 잡았다. 모두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궁굼해하던 차에 공자도 이 소식을 듣고 구경을 갔다. 그 짐승이 있는 곳에 당도한 공자는 잡힌 짐승을 보자 갑자기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기린이었던 것이다. 기린은 성왕에 의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그 조짐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성왕의 치세가 아닌 난세에 잘못 나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잡힌 기린을 보고, 공자는 자신의 운명을 비춰서 슬퍼한 것이다.
  이로부터 두 해가 가고 공자의 나이 73세가 되던 해 어느날 아침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읊었다.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려는가? 철인哲人이 시들려는가?"

   이 노래를 끝으로 공자는 조용히 그 거룩한 생을 마감했다. 때는 기원전 479년 노애공魯哀公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이었다.

사람다움과 사람답게 사는 법

   공자 사상의 정수이며 극치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인仁이다. 공자가 일생동안 역설한 것이 인 하나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인을 말할 때 상대방에 따라서 다르고 또 언제나 인의 일부분을 말하던지 혹은 인을 행하는 방법을 말해 주었을 뿐 인 전체에 대해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해서 밝힌 적이 없다. 따라서 인을 정확히 정의하여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공자의 제자인 번지가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논어·안연』)

인의 기본적인 의미는 타인에 대하여 절실한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는 말이다.
   한번은 안연이 인에 대해서 물었다.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되는 것이다."(『논어·안연』)

   예란 일종의 행위규범이다. 예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개인의 행위를 사회에 공인된 규범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공자는 인에 대해 "인이란 사람이다"(『중용』20장)고 하기도 하였다.
   인仁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두 이二자와 사람 인人자를 합쳐 놓은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이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태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제도 등과 같은 유형적인 여러 가지 장치가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앞서 사람 각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태도란 다름 아닌 '사람이란 사람다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자가 말하고 있는 인이란 '사람다움'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인 것 같다. 따라서 공자가 일생 동안 역설한 것은 결국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방법道인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인은 원래 동이족이 갖고 있던 성품이며 마음씨라고 한다. 동이족들은 원래 남과 나를 남남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공동체로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이 인이다.
   현실에서 남과 나를 하나로 파악할 수 있는 인간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부모와 자녀는 육체적으로는 각각 독립된 존재이지만 유전적 내용과 본질적 측면에 있어서는 하나인 관계로 유지되어 있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하나로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자녀의 효이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다. 이 마음이 계속 유지되면 형제간도 하나의 몸과 같은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이러한 마음을 더욱 확산시키게 되면 결국 모든 사람과 내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며, 이 때 사람다움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자는 사람답게 사는 출발을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서恕와 충忠이라고 한다. 서는 남과 내가 같은 마음을 말하는데, 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은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는 또한 '진실된 속 마음'을 의미하는 충과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서 사람다움의 실천이란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다

   공자는 인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공자는 계강자가 정치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정치란 바로잡는 것이다"(『논어·안연』)고 하였으며, "임금이 바르면 백성은 자연히 바르게 된다. 임금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은 행하고 임금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백성은 행하지 않을 것이다"(『논어·자로』)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보면 공자에게 정치란 사람답게 되도록 바로잡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로잡는 것일까?
   제나라에서 공자는 경공을 만나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임금은 임금답게 해야 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해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해야 하고 아들은 아들답게 해야 합니다."(『논어·안연』)

   사람이 각각이 자신의 사람다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맡은 일을 다할 때 질서는 저절로 바로잡힐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회의 각 구성원이 각각의 역할을 다할 때 사회 전체는 조화를 이루는 바람직한 사회가 된다.
   한 번은 자로가 공자에게 나라를 안정시킬 묘책에 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반드시 명분을 바로 잡겠다."(『논어·자로』)

   정치의 근본은 사회 전체를 안정시키는 것이고 그 근본적인 방법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각 자기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질서있고 안정된 사회를 이룩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명분이 바로서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 사물에 붙여진 이름은 모두 저마다 각각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 집합된 사물의 본질이며 우리가 실제 사물에 붙인 이름과 그 사물의 본질이 일치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의 사회 관계를 가리키는 명칭은 각기 거기에 부합되는 책임과 의무를 의미하기도 한다. 만일 다스리는 이가 이 왕도에 따라서 정치를 한다면 그것은 명실상부한 임금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명목상 임금일 뿐이지 진정한 임금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임금이나 신하,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그러한 사회관계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누구나 그 이름을 지녔으면 이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이며 정명론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참교육의 실현

   공자는 그의 학문적 성과를 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치적 지위를 갖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을 만나는 동안에도 전국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여드는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자 이전의 교육은 전적으로 국가가 관장하고 있었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 뿐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일정한 예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여 가르쳤다. 따라서 공자는 중국 최초의 사립학교의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 공자는 언제나 친절과 공평무사로 교육의 주지를 삼았다. 아무리 과거의 행실이 잘못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진실로 뉘우치고 배움을 청하여 오면 누구도 물리치지 않았다. 특히 공자는 3천에 이르는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오늘날의 교육과 같이 대단위 강의실에서 획일적으로 하는 주입식 강의 보다는 학생들의 자발적 노력을 강조하였으며, 각각의 제자들을 개별적으로 지도하는데 힘썼다. 여러 제자들로부터 같은 내용의 질문을 받더라도 그 질문자의 교육수준과 그가 처한 환경 상태를 고려하여 각각 수준에 알맞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인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을 때에도 거기에 대한 공자의 대답이 항상 달랐던 것이다. 또한 공자는 아무리 제자라 하더라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모든 학생들을 대하였으며, "후배들의 발전이 두려워할 만하다"고 하면서 언제나 후배들에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든 일에 있어 제자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으며 자식을 대하는 것과 똑 같은 마음으로 제자를 사랑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

   공자는 한 때 어떤 은둔자로부터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조소를 받았는데, 이에 대해 공자는 "군자가 벼슬을 하는 것은 그 의義를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을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논어·미자』)고 하였다.
   공자에게 있어 의義라는 관념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실천이다. 이것은 곧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할 뿐이며, 그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옳고 또한 도덕적 충동 이외에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천은 자기 마음 속의 만족 외에 달리 보상받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공자 사상의 비극이 들어 있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공자 사상의 강점이 있다.
   인간이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공자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행위에 대해서는 대가를 바라지 말 것을 주장한다. 마땅히 해야 할 행위의 가치는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이지 외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이 결과적으로 이로운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지지 말고 오직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옳다면 비록 그 일을 하다가 해를 입을 지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 사람다움을 이루는 길이다. 그리고 공자의 사상에는 행위에 대한 인과 응보가 없다. 다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가 있을 뿐이다. 그런 당위는 사람이 마땅히 갖는 책임이나 사명의식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공자 역시 천하를 개혁하려고 한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실망하지 않았으며, 성공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가교

   현대의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작게는 인간 개개인의 자아상실로부터, 크게는 인류의 생존자체에 대한 위협에 이르기까지, 이미 한 국가, 한 민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문제이며, 전 인류의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가 직면한 문제들은 본질적이며 복합적이며 세계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복잡한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로 일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사유의 세계가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 본질문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해답이며, 과거와 현실에 대한 철저한 해석을 하고, 미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구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문명의 위와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서구적 가치관이나 철학만으로는 치유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오히려 문화생리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문화에서 그 처방을 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서구 세계의 물질 문명을 이끌어 온 이성주의 및 합리주의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이를 대신할 새로운 철학적 대안을 찾는데 주목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공자 철학의 사유 체계이다. 흔히 현대의 문제점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화, 정신과 물질의 이원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만큼, 이것들을 하나의 체계 속으로 환원시키는 공자의 사유방식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동양의 전통사상인 공자 철학의 재 음미가 요구되는 까닭이 있다.
   최근 어떤 학자는 공자의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대해 '뒤돌아보기'식 사상 이라고 단정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의 발목을 수시로 붙잡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공자의 온고지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공자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의 사상을 계승하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고 했다. 공자가 만약 과거에만 집착했다면 그의 사상은 빛을 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수천 년 동안 동양사회를 지탱하는 이념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공자는 하 은 주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된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한 단계 진보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지, 과거로 돌아가자고 말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자가 온고지신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적은 옛 것만을 무조건 뒤돌아 보는 것[온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새로운 것을 아는데[지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고 미래를 창조하며 진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온고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공자는 하나의 다리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가교라는 것이다. 현재라는 다리를 통해서 과거와 미래는 연결된다. 따라서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없고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사상은 현재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며,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것이다.

☆ 이 글은 『유교 인간학』(성균관대학교출판부, 유학주임교수실 편저)에 실린 원고의 일부임을 밝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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