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       語

一. 學而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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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01.gif 子ㅣ曰 道1)千乘2)之國하되 敬事而信하며 節用而愛人3)하며 使4)5)以時니라

bgar1.gif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되 일을 경건하게 처리하고 미덥게 하며, 씀씀  이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알맞은 때로써 해야한다."

  

1) 道:導와 통용되어 '인도하다' '다스리다' 등의 뜻이 된다.
2) 乘:말 네 마리가 끄는 戰車. 一乘에 甲士 3人, 步卒 72人, 취사병 10人, 피복담당 5人, 말담당(수송) 5人, 땔나무와 물     담당 5人, 도합 100人이 따라붙는다. 대체로 天子는 萬乘, 諸侯는 千乘, 大夫는 百乘을 보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3) 人:民과 구별된다. 人은 원래 人方族, 즉 東夷族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는데, 東夷族이 원래 어질고 예절바른 군자들     이었으므로 나중에 '군자', '관리', 또는 '귀족'이란 뜻으로 사용되다가 점차 '사람'이란 뜻으로 보통명사화 된 것이다.
4) 民:백성. 주로 농민을 지칭한다. 民은 원래 중국 서부지역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었다는 설이 있다.

  千乘의 나라란 제후국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제후국을 다시리는 요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경히 한다는 것은 자기가 맡은 일에 정신을 몰두해서 마음이 산만하지 않게 일을 처리함을 이른다. 그렇지 않고 일을 담당한 자가 자기일에 몰두하거나 집중하지 않고 매사에 산만하게 처리한다면 아무도 그를 신임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나라를 다스리는 제후가 매사 일을 공경히 처리하지 않고 대충대충 처리하게 되면 제후 이하 모든 관리 역시 일처리에 있어서 방만할 것이고, 따라서 백성들의 생활태도 역시 태만해지기 마련이다. 또한 제후의 일처리 역시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은 자연 제후를 믿지 않고 의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솔선수범해서 일을 공경히 할때 백성들이 믿고 따라서 나라 경영의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 필요한 모든 비용은 국민의 세금에 의해 지출되어진다.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국민의 세금을 쓰는데 무엇보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국민들이 낸 세금을 쓰는데 절약하지 않으면 국고는 자연 바닥이 나고 그에 따라 나라의 경제 살림 역시 궁핍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국가에서는 갖은 명목을 내새워 또다시 세금을 올리거나 말도 안된는 구실로 또다른 조항을 만들어 국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만든다. 결국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되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더군다나 정치가가 백성들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저 착취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나라의 장래는 더 이상 보장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나라들의 운명과 그러한 정치가들의 비참한 말로를 많이 보아왔다. 나라를 파산의 지경에 내 몰고,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자기의 배만 채워왔던 정치가들이 결국에는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의 배만을 불려왔던 악덕 기업주들의 폐해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보아왔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전적으로 국민의 힘에 의존해야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과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의 중국의 생산활동은 주로 농업에 의존해왔다. 당시의 농업은 지금과 같이 기계화된 영농이 아니었으므로 전적으로 자연의 힘에만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농업은 무엇보다 때(시기, 절기)에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파종할 때, 김맬 때, 수확할 때, 번식할 때, 이 중 어떤 한 때라도 노치게 되면 농사는 망치게 되고, 농사가 나라의 기간산업이라면 나라의 경제 역시 궁핍하게 된다. 따라서 국민의 힘을 빌 때나, 백성을 동원하여 나라의 일에 부역시킬 때엔 무엇보다 백성들을 부릴 때를 잘 선택해야 한다. 농번기 때에는 열심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농한기 때를 가려 축성(築城)을 하고, 군사훈련을 시킨다면 나라의 경제도 튼튼해질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 역시 풍요로울 수 있는 것이다. 나라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어떤 일이건 경건하게 하고, 신의를 지켜 백성드로부터 신음을 받으며 모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고, 제정의 낭비와 비용을 줄이고 백성들의 힘을 이용함에 있어 때를 잘 선택해 농한기에 부역시키는 것은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다섯가지 항목을 실현함으로써 도덕의 실천과 경제의 부흥이라는 정치의 두 요소가 구비되는 것이다.

6

fish01.gif曰 弟子1)入則孝하고 出則弟2)하며 謹而信하며 汎愛衆하되 而親仁이니 行有餘力이어든 則以3)學文이니라

bgar1.gif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제자는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하며 삼가하고 미덥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친해야 한다.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운다."

1) 弟子 : 여기에서는 공자 자신의 제자들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단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이른다.
2) 弟 : 원래는 '아우'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나, 여기에서는 '공손함'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공손할 제"
3) 以 : 전치사. "~으로써", "~을 가지고". 전치사 以의 목적어는 대체로 문장 속에 제시되어있으나, 간혹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생략될 수    있다.

       ●목적어가 이미 앞에서 제시된 경우.
            ex)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 옛 것을 파악하여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
                 위의 문장에서 以는 溫故而知新을 목적어로 한다. 可以溫故而知新爲師矣의뜻이지만 溫故而知新이 앞에 나
                 왔으므로 생략한 것이다.

         ●以의 목적어가 'something', 'somewhat', 'someone', 'everything', 'evetyone' 등에 해당하는 경우.
            ex) 不學詩 無以言 不學禮 無以立 : 詩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고, 禮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
            이 문장에서 以의 목적어는 제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경우인데, 굳이 말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무슨 수
            를 쓰더라도'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즉 "시를 배우지 않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말을 할 수 없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도 설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餘力"이 以의 목적어 임.

  오늘날의 교육내용과 과거의 교육내용을 현저하게 비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교육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순히 체계화된 지식을 습득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면, 이 문장에서 공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교육 내용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체계화된 지식을 습득하여 단편적인 정보를 뇌에 저장하기 보다는 그 전에 우선 인간다운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공자사상의 핵심을 한 마디로하면 "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자는 평생도안 "인" 하나만을 주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을 현대적인 언어로 풀이해본다면 그것은 "사람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다움"을 실현하고, 실천하는 것이 공자사상의 핵심이며,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克己復禮"이다. 극기복례란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자기(己)란 생물학적인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며, 禮란 天理에 의해 규정된 인간 행동의 고유한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극기복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합리적 행동질서와 자연적이고 무절제한 욕망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욕망의 절제를 통해 합리적 행동질서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인간은 생물학적 자아의 욕구를 통제하고 도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따라서 공자는 禮의 가르침을 중심으로한 인간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가장 절실하고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이 孝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면서 특히 예가 필요한 것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예를 달리 표현하면 사회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사회적으로 공인된 규범이라고 할 수 있으니, "예를 회복한다"든가 혹은 예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은 곧 나의 행위를 사회적으로 공인된 규범에 맞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은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를 이루고 살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과 조화를 이루고 질서있는 사회를 구축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이 예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일차적이고 근본적으로 사회관계를 맺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이고, 그 다음이 형제와의 관계이다.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는데있어 필요한 행위의 덕목 가운데 부모에게 행해야할 행위 덕목이 孝이고, 형에게 필요한 행위 덕목은 弟이다. 따라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람다움"을 실현하고 실천하기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하는 것은 "효"와 "제(弟-공손함)"이다. 공자 역시『논어』에서 "孝와 弟가 仁을 행하는 근본이다"고 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사회적 관계는 부모형제로부터 점차 확산되어 가는데, 인간이 부모형제 및 일가친적을 제외한 아니 이들을 제외하지 않더라도,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는 신중하고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 만일 나의 행동이 어떤 일에서나 신중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면 절대 남에게 신뢰받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람다움"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있는 다섯가지 덕목(五倫-親, 義, 別, 序, 信)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배움의 단계에 있는 어린이의 입장에서는 아직 군신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부부관계역시 아직 형성되기 이 전이기 때문에 義와 別은 지킬 수 없는 것이겠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집 밖에서 공손하며, 자신의 행동거지를 항상 삼가서 누구에게나 신임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이미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 도리는 다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도리를 다 실천하고, 실현할 수 있는 덕목을 다 실현한 사람을 공자는 "사람다운 사람",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공자의 학문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이와같이 "사람다움", "인간다움"을 실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단편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우선 "글을 배우기전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고 한 것이다.
  과거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초위에서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자녀가 태어나서 글을 익히기 전부터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가르쳤고, 형제간의 우애를 가르치며, 행동거지를 삼가고 믿음있게 행하며 널리 많은 사람을 사랑할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있어 학문은 이와는 매우 차이가 난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학문이라함은 일반적으로 과학이 주도하고 과학은 자연과학이 주도하는 입장에 있었으며, 이러한 자연과학적 학문의 성격은 몰가치적임을 그 특성으로 한다.  즉 사실자체의 구명이 문제의 핵심이지 그 사실구명의 결과와 효용성 여부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 중요할 따름이다. 이러한 학문경향이 오늘의 학문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지식일변도의 현상을 낳게 되었고, 그에따라 교육현실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이 초래되어 학문에 있어서 지식과 인격, 인식과 실천은 마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사회에서 바라는 인간상 역시 인격을 갖춘 사람 보다는 보다 많은 체계화된 지식을 갖춘 인간, 도덕적으로 갖추어진 인성 보다는, 많은 정보를 담지하고 있는 기계적 두뇌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결과 교육현실에 있어서도 보다 낳은 인간상을 제시하고, 전인적 인간, 인격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 아닌 무한 경쟁시대에 남을 이기고 살아남기위한 훈련이 실시되어지고, 교사 역시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체를 기르기위한 스승상이 요구되어지기 보다는 단지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기술적으로 잘 전수할 수 있는 기능인이 요구되어지고 있다. 그 결과 교육현장에서는 교권이 무너지고, 청소년층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연령층으로 비춰지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청소년층에서만 빗어지는 상황은 아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유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이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얼마전 대한민국 최고의 그룹 광고 카피가 다음과 같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는 인간을 성적순으로 등급을 매기고 무한경쟁을 부추겨 그 경쟁속에서 일등으로 살아남은 자만을 요구한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원이 다 1등이 될 수 없는 데도 말이다. 2등 부터는 필요없는 존재이고 기억하고싶지 않은 존재라는 말이다. 참으로 살벌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무슨 수를 쓰더라도 1등을 해야한다. 내가 아니면 내 자식이라도 이러한 사회에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존재로 남아있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러한 불안심리는 급기야 유아기에 있는 아이에게까지 혀바닥을 자르게하는 살풍경을 연출하게 만들었다. 내 아이가 어떠한 언어영역에 관심이 있든 상관 없다. 그저 영어를 잘하기만 하면 된다. 내 아이가 미술에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다. 옆집 아이가 미술학원에 다니면, 내 아이도 미술학원에 다녀야하고, 옆집아이가 음악학원에 다니면 내 아이도 음악학원에 다녀야한다. 예술적인 감흥을 통해 인격의 완성을 도모하는 것은 우스운 얘기다. 무조건 옆집애 보다 잘하면 된다. 너는 누구누구보다 뛰어나야 되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걔를 이겨야 한다는 것이 부모의 요구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렇게 해서 보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유리한 조건을 점령한 사람은 대학진학이나 취업에 한 층 수월할 수 있겠지만 평생을 이러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마음 속에 비춰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은 그야말로 전쟁터일 것이며, 벗이든 친구이든 이웃이든 모두가 싸워이겨야할 적군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 내 옆의 친구와 경쟁해서 이겨야 하고, 내가 취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구를 발판으로 올라서야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제 친구란 서로 믿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라 내 출세를 위해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야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이 취업을 했다고 없어질까? 취업을 하고 조직사회의 구성원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조정이니, 명퇴니하는 마당에 영원한 동료란 있을 수 없는 말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이렇게 평생을 전쟁아닌 전쟁을 치르며 산다면 결국 노년에 남는 것이라고는 허무함밖에는 없을 것이다. 진정 자신을 찿는 삶,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위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저 전쟁터에서 목숨만을 부지하기위해 살아온 삶에 지나지 않는다면 참으로 살아온 자체가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출세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출세의 척도가 금전과 권력, 부와 명예로만 이루어지는 세상이고보니, 도덕적인 삶이란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출세를 위하면 각종 비리와 부폐, 청탁과 뇌물이 판치는 사회가 되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이러한 각종 비리와 부폐, 청탁과 뇌물에 연루되어있는 작자들을 보면 모두가 사회적 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고 그들의 학력 또한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작자들이다. 결국 그들의 머리 속에 아무리 많은 지식의 조각들이 들어있고, 아무리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다 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진정 인류사회에있어 그들은 암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참으로 많은 학식을 갖추고 사회적으로 최고로 출세한 자들이 인류 최대의 적이 되었던 적은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는 곧 학문과 교육을 전인적 인격의 완성을 위한 과정으로 보지 않고 단지 사회적인 출세를 위한 도구로 이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은 단순히 체계화된 지식 내지 그러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공자의 학문은 내면적으로는 자기를 완성하고 밖으로는 타인 뿐 아니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완성시켜 모두로 하여금 그 타고난 생명을 조화롭게 영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은 체계화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습득하고 암기하고 있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의 학문이 앎 자체(知)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의 학문에 있어서도 知는 매우 중요시 여겨진다. 그러나 공자의 학문이 知를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건전한 행동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知가 行을 전혀 유발하지 못한다면 그 知는 한갓 관념에 불과한 것이고, 그러한 지를 내용으로 하는 학문은 단순한 지적유희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知와 行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극단적인 파행상태를 가져오면 인간은 내적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이 갈등은 생활 주체로서의 인격을 지리멸렬케 하고 만다. 여기서 또 인간의 소외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여기에 현대 학문의 맹점이 있는데, 이 맹점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도 공자의 인간중심 학문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공자철학의 현실성은 현실상황 속에서 그 시대적 문제의 해결을 통한 이상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지 지식일변도가 아니고, 그 뿐 아니라 오히려 行을 더욱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학문이 건전한 행동을 유발하고 그리하여 바람직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될 때 참다운 학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 공자철학은 오늘날 지식일변도의 학문적 성향이 가져다주는 폐단을 개선하는데 있어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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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01.gif 子夏1)ㅣ曰 賢賢2)하되 易色3)하며 事父母하되 能竭其力하며 事君하되 能致其身하며 與朋友交하되 言而有信이면 雖曰未學이라도 吾必謂之4)學矣라하리라

bgar1.gif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되 色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친구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

1) 子夏(자하, BC 507∼BC 420?):姓은 복(卜), 이름은 상(商), 子夏는 그의 字. 위(魏)나라 산서성(山西省)출생. 출생에 이      설도 있다. 공자보다 44세 아래이며, 공자의 제자로 공문 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이다. 공자가 죽은 뒤에 위나라 문      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으나 공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실명(失明)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은 특히 詩와 禮      에 통하였으며, 공자의『춘추(春秋)』를 전하여『공양전(公羊傳)』과『곡량전(穀梁傳)』의 원류(源流)를 이루었다. 주      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2) 賢賢:앞의 賢은 '어질게 여기고서 좋아한다'는 뜻의 동사이고, 뒤의 賢은 명사로 앞에 동사쓰인 賢의 목적어이다. '어     진 사람' 또는 '어     진 것'이란 뜻이 된다.
3) 易色:何晏이나 朱子는 모두 易을 '바꾼다', 色을 '女色'으로 봄으로써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꾼다'고 해석하였고,     王念孫은『廣雅』에 '易은 如와 같다'고 한 말을 참고하여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같도록 한다'고 해석하였다. 일설     에는 易의 음을 '이'로 읽고 輕의 의미로 보아 '여색을 가볍게 여긴다'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또 色을 '얼굴빛'으로보     아 '얼굴빛을 바꾼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며, '賢賢易色' 넉자를 부부관계의 윤리로 보아,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현     명함을 현명하게 여기고 성생활을 가볍게 여긴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4) 之:대명사로서 賢賢에서부터 言而有信까지에 해당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공자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힌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네 가지 것도 결국은 인륜을 밝히는 공부라 할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행동양식을 표현한 것은 예(禮)이고, 賢者는 성인의 예를 따르고 실천하는 자이므로, "어진이를 어질게 여긴다"는 것은 곧 禮를 따르고 실천한다는 의미가 되고, 부모를 섬기는 일은 仁을 실현하는 것이며, 몸바쳐 인군을 섬기는 일은 義, 친구간의 신의는 信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人倫의 근간으로, 공자의 학문에 있어 배우의 道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행함에 반드시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진정한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子夏는 공자의 문하 주에서 특히 文學으로 이름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능히 위에서 말한 내용과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일 타고난 資質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학문에 힘쓰기를 지극히 해서일 것이니, 비록 혹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이미 배웠다고 이르겠다"고 했으니, 이 말에서도 공자가 말하는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가 어디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하의 이 말은 그냥 무심히 읽다보면 비약이 너무 지나쳐서 그 흐름의 폐단이 장차 혹 학문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할 수 있다. 실제 학문을 하지 않고서도 학문이 목적하는 바를 실천하기만 하면 학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학문을 하지 않고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윗 章에서 공자가 "남은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고 한 것과 같이 한 뒤에야 폐단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공자가 이루고자 하는 학문의 목표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명을 깨달아 성인(聖人)이 되는데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자가 말하고 있는 배움(學)이란 본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성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행동양식을 표현한 것은 예(禮)이다. 성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예에 속하며, 사회의 모든 제도와 질서를 준수하는 성인의 행동양식이 모두 예에 속한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는 배움의 대상은 우선 예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예를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 학문의 일차적인 목표인 것이다. 성인의 행동거지, 성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본받아 그것을 제 때 제 때 내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학문의 일차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런데 천명을 깨닫고 완전히 실천하는 성인은 현실적으로 드믈게 존재하고, 혹 존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인이나 현인, 군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고, 공자 역시 자신의 도를 펼치기위해 주유천하 했지만 결국 한번도 중용되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했다. 성인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그를 본받고 그의 됨됨이를 흉내라도 낼텐데...... 현인이나 군자를 인정함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매우 인색하다. 특히 지적수준이 조금 높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남의 어짊을 어질게 보아주는데 더욱 인색하다. 주변의 누가 현인군자로 이름이 나면 오히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헐뜯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록 간혹 현인 군자를 알아보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세속적인 삶에 깊이 물들어있는 사람들은 예를 따르고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성인의 발자취를 좇고 예를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여간 절실해서는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자하는 '남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되 色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해야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색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이성간에 강하게 서로 갈구하고 원하는 사랑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여서 개체의 번식이 없다면 결국 1대에 한하여 멸종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종족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개체번식이 있어야 하는데, 개체번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능적으로 색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만약 개체번식을 위한 행위가 고통과 아픔, 슬픔, 끝없는 노동으로만 여겨진다면 결국 인류는 멸종되고 말테니까. 따라서 색을 좋아하는 본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숭고하고 간절하며 가장 성실한 마음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는 마음을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한다는 것은 현인의 행동거지를 따르고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을 원초적이며 본능적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래야만 성인의 예를 따르고 실천함에 誠實함이 있어, 중도에 포기하지않고 천명을 깨달아 천명에 따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천명에 따른 삶을 산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말이고, 성인의 삶은 인륜을 실현하는 삶이므로 "賢賢易色"하게 되면 결국 자하가 말한 나머지 내용(人倫-親, 義, 別, 序, 信)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8

 曰 君子1)不重2)則不威3) 學則不固4)니라 主忠信하며 無友不如5)己者 過則勿憚改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신중하지 아니하면 위엄이 없으며 배우면 고루하지 않게 된다. 忠과 信을 주로 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삼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

 

1) 君子:『논어』에서 君子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지나, 여기서는 '학문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2) 重:신중(愼重), 후중(厚重).
3) 威:위엄(威嚴), 여기에서의 위엄이란 '힘으로 위압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 속의 경건함과 성실함이 밖으로 전달되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갖도록 한다'는 뜻이다.
4) 固:'고루하다'. 주자는 '견고하다'는 뜻으로 보아 '군자가 신중하지 아니하면 위엄도 없고 배움도 견고해지지 않는    다'고 해석했다.
5) 不如 : '∼만 같지 못하다.' 비교격으로 쓰였다. 대체로 '不如'는 '莫若', '不若' 등과 같이 '∼만 같지 못다다'는 비교격으    로 쓰이나 간혹 '∼과 같지 않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ex) 子曰夷狄之有君이 不如諸夏之亡也니라(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오랑캐에게 임금 있는 것이 중국의 여러 제후국에 없          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데, 이 문장에 대해서 '오랑캐에게 임금 있는 것이 諸夏중국의 여러 제후국에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해석한 학자들도 많다.

 이 문장은 어린 제자들이 학문을 대할 때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 학문할 때의 태도는 6장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제일 먼저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공자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기본적으로 가장 먼저 성현의 禮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또한 예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성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배우는 것이므로 이는 성현들의 인품과 생활태도를 배우고 익히는 일이다. 성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배우고 따라 그것을 완전히 내것으로 만들어 억지로 예를 행하려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예가 풍겨나오도록하면, 곧 나의 일거수 일투족은 언제나 위엄있고 남의 귀감이 되어 존경받을 수 있다. 그런데 예를 배움에 있어 신중하지 못하고 경거망동한다든가, 대충대충 건성건성하면 학문이 진전되지 못하고, 경건한 마음과 성실한 자세가 결여되어 예를 익히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무엇을 배우든 모든 것이 수박 것핥기식이 되어 아무리 열심히 배웠다 하더라도 완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예를 행한다 하더라도 형식적인 것을 흉내내는데 불과할 것이며, 조금만 지나면 그것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어 흉내조차 못내게 되고 만다. 따라서 어린 제자들이 학문을 하는데 가장 먼저 취해야할 태도는 무엇보다 신중한 자세라는 것이다.
  그 다음 제자들 가져야할 태도로서 忠과 信을 들었다. 충이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성실함을 모두 발휘하는 것(盡己之謂忠)을 의미한다. 또한 忠字를 분석해보면 中과 心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글자이다. 따라서 충이란 마음 한가운데 중심을 잡고 어떤 외부의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는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信은 인간관계에 있어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다섯 가지 덕목(親, 義, 別, 序, 信) 가운데 친구간에 치켜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따라서 忠과 信을 말한 것은 학문을 하는 제자들이 항상 진실된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임하고, 또한 교우관계 역시 진실된 마음과 믿음으로써 지속해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 다음은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조금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람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사귀지 않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친구삼으려 한다면 결국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과는 친구삼으려하지 않고 나보다 나은 사람과 사귀려 하지만, 나보다 나은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나와는 사귀지 않고 자기보다 나은 어떤 사람과 사귀려고 할터이니 그렇다면 결국 누구를 사귈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말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공자가 이 말을 한 의도는 만일 내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벗을 하면 더 이상 학문에 진전이 없고, 고작해야 제자리 걸음뿐일 것이며, 심한 경우에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하고, 자만에 빠져 게으름을 피우게 되는 폐단을 경계하기 위해서 한 말일 것이다. 더구나 공자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단편적인 체계화된 지식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를 익히고, 천명을 깨달아 천명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니, 이런 학문에 있어 행실이 신중하지 못하고 자만에 빠지거나 남을 없신여겨 깔보는 태도는 가장 경계해야할 태도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데 과감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단점을 알면 고치기를 원하면서도, 자기의 허물을 고침에 있어 과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자기가 저리른 허물에 대해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그러다 보면 惡이 날마다 불어나, 결국은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허물이 있으면 마땅히 속히 고쳐야지 그것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허물 고치기를 꺼려 구차하게 안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학문의 道는 별다른 이상별건물사가 아니다. 바로 자기의 不善을 알면 속히 고쳐 善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