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易上經

2.坤

  

坤上

坤下

牝馬1)之貞이니 君子有攸往이니라하면하고하면하리니 主利하니라 西南 得朋이오 東北 喪朋이니 安貞하여하니라

(本義)坤은 元亨하고 利牝馬之貞이니 君子有攸往인댄 先하면 迷하고 後하면 得하여 主利하니 西南은 得朋이오 東北은 喪朋이니 安貞하면 吉하리라

坤은 元하고 亨하고 利하고 암말의 貞함이니 君子의 갈 바를 둠이다. 먼저 하면 혼미하고 뒤에 하면 얻으리니, 이로움을 주장한다. 서쪽과 남쪽은 벗을 얻고 동쪽과 북쪽은 벗을 잃을 것이니, 安貞하여 길하다.

(본의) 坤은 크게 형통하고 암말의 貞함이 이로우니 군자가 갈 바가 있을진댄 먼저하면 혼미하고 뒤에 하면 얻어 이로움을 주장하니 서쪽과 남쪽은 벗을 얻고 동쪽과 북쪽은 벗을 잃을 것이니, 貞을 편안히 여기면 吉하리라.

1) 牝馬 : 암말.

 곤괘의 괘사이다. 곤괘는 건괘의 상대로서 건괘는 여섯 개의 효(爻)가 양으로 되어 있는 반면 곤괘는 모든 효가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四德은 같지만 貞의 體가 다른 것이다. 건괘는 剛固함을 貞으로 삼지만, 곤괘는 유순하여 貞한 것이다. 그러므로 곤괘에서도 건괘와 마찬가지로 그 작용을 元亨利로 설명하고, 다만 貞의 성격이 건괘와 다름을 보아 貞을 牝馬之貞이라 하였다. 牝馬는 암말이다. 암말은 유순하면서도 지상을 멀리까지 달리는 능력을 가진 동물이다. 그리고 또한 암말은 성장한 자기의 새끼와 교미를 시키면 거부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乾에 비해 유순하고 치밀하며 분별력이 있으면서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력이 있는 坤의 작용을 암말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묵묵히참고 견디면서 시비를 가리는 貞의 작용이 건에 비하여 곤이 더욱 현저함을 강조하여 암말의 貞한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결국 곤의 성격은 지극히 유순하지만 실적적인 일을 하는 모습은 땅이 영원히 만물을 기르듯이 꿋꿋하고 지극히 조용하지만 그 작용이 어긋나거나 흐트러짐이 없이 방정하며 만물을 낳고 기르는 땅의 역할이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이다.
 한편 곤괘는 모든 효가 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괘는 시간적으로 볼 때 음의 성격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고, 공간적으로 보면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음의 성질은 양의 성질과는 정 반대로 물질적인 가치를 중시하고, 합리적이면서도 기계론적인 사고를 따르며, 유물적 사관을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의 사상체계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이 순자의 성악설이다. 따라서 음으로만 구성된 곤괘는, 공간적으로는 성악설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집단에 비유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는 성악설적 사고로 진행되는 시대에 비유할 수 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해 본다면 국가적으로 볼 때 건괘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나라가 한국이라면 곤괘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나라는 일본이다. 한국에서는 정신적 가치가 중시하고 종교와 도덕을 위시한 인문과학이 발달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물질적 가치가 중시되고 법과 윤리를 중시하는 사회과학과 산업을 중시하는 물질과학이 발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
 한편 유학사상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음과 양의 조화에의해 생장소멸한다. 그리고 주역에서 순양으로 이루어진 건괘는 하늘을 상징하고 순음으로 이루어진 곤괘는 땅을 상징한다. 또한 가정을 비유해보면 건괘는 아버지에 해당되고, 곤괘는 어머니에 해당된다. 따라서 하늘과 땅은 가정으로 말하면 자녀를 낳고 기르는 부모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음양론의 입자에서 보면 이론을 제시하고 원칙을 세우는 것이 양의 역할이라면 실질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은 음의 역할이다. 양은 추진력이 있고 창의력이 있어 이론을 제시하고 원리를 찾아내는 일에는 능하지만, 일을 마무리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능력은 부족하다. 그 원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는 구체적인 능력은 음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음이 남의 앞에 서서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창의적인 원리를 찾아놓은 것을 응용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면 능력발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음은 항상 양을 따르는 것이므로 언제나 양이 선창하기를 기다려 화답하니, 음이 양보다 먼저하면 혼미하고 어그러짐이 되고, 뒤에 처하여야 떳떳함을 얻는다. 땅의 형세는 곤의 덕이다. 그러므로 곤의 상황에 처한 군자는 땅의 작용을 참고하여 후덕하게 만물을 실어서 기른다. 땅은 하늘의 뜻을 뒤이어 만물을 낳기 때문에 곤덕을 가진 사람은 "먼저 하면 혼미하고 나중에 하면 얻는다"고 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세계적으로 독창적이거나 창의적인 일을 하는 데는 서투르지만 다른 나라에서만들어 놓은 이론을 받아들여 현실에 응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그들이 곤괘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위에서 곤괘의 사상(思想)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이 순자의 성악설이라고 했는데, 순자의 철학사상은 인간의 정신세계보다는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세계를 중시하는 철학이다. 따라서 순양으로 이루어진 건괘가 사람에게 있어 마음의 요소를 상징한다면 순음으로 이루어진 곤괘는 몸의 요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의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세계를 중시하고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은 몸의 세계를 중시한다. 그리고 양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종교를 발달시키고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과학을 발달시킨다. 양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의리를 중시하고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이익을 중시한다. 또한 만물의 삶과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건(하늘)의 작용이라면, 하늘의 작용을 받아 만물을 기르고, 두터운 덕을 배푸는 것은 곤(땅)의 작용이다. 즉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은 곤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곤괘를 설명하면서 "이익을 주로 한다"고 하였다.
 또 방위로 보면 동쪽과 북쪽은 양의 방향이고 서쪽과 남쪽은 음의 방향이다. 그러므로 서쪽과 남쪽으로 가면 벗을 얻는다는 말은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곤괘와 동류이기 때문에 벗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와 반대로 동쪽과 북쪽으로 가면 벗을 잃는다고 한 것은 양의 성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이질성으로 인하여 벗을 잃는다는 말이다. 벗을 잃는다는 말은 벗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양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 틈에 있게 되면, 실질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실질적인 효과를 추구하는 성격 때문에 의리를 중시하고 추상적인 원리를 추구하는 양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움을 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음끼리만 있으면 금방 친해질 수 있지만 오래 있으면 이익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마찰이 일어나게 된다. 또, 음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양이 없어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된다.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에 양의 성격으로 이를 보완해주지 않으면 이익만을 추구하는 천박한 사람으로 전락하기 쉽다. 따라서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양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우선은 이질적인 요소 때문에 서로 마찰이 일어나지만 이것을 참고 견뎌 극복하면 결국 상호간의 단점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게 되어 완전한 인격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동북으로 가면 벗을 잃지만 결국에 가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初六1) 履霜하면 堅氷至하나니라

 初六은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

 

1) 初六(초육) : 괘의 제일 아래 있는 음효(陰爻)를 말한다. 모든 괘는 6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괘를 그릴 때   모든 효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므로 맨 아래에 있는 효를 初라 한다. 그리고 양수(陽數)에 있어서 九는 노양(老陽)이 되   고 七은 少陽이 되며, 음수(陰數)에 있어서는 六은 노음(老陰)이 되고, 八은 소음(少陰)이 되는데, 노양과 노음은 변하지   만 소양과 소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易)의 본래 의미는 변화이고, 효 역시 변화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주역』   의 각 효를 읽을 때 모든 양의 효는 九, 모든 음의 효는 六이라 칭한다.

  이 爻는 陰이 처음 아래에서 생겨나서 그 단서가 매우 미약하지만, 모든 효가 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세는 반드시 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국이 서리를 밟으면 장차 단단한 얼음이 이르게 됨을 아는 것과 같다. 이는 小人이 처음에는 비록 매우 미약하지만 자라나면 점차 盛함에 이르므로 처음부터 자라나게 해서는 안됨을 경계한 말이다.
  한편 곤괘의 괘사를 설명하면서도 밝혔지만 곤괘를 대표하는 사상체계는 순자의 성악설이다. 성악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惡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있는 인간은 항상 악한 자신의 본성에 따라 서로 다투게 되고, 그 결과 사회가 혼란해져서 결국은 인류가 멸망하는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규칙과 예절을 만들어 꼭 지켜야 한다. 이러한 성악설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우환의식(憂患意識)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인간을 본성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면 결국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걱정인 것이다. 이러한 우환의식은 자연과 현실 및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보다는 부정적인 사고에 의해서 생겨난다. 예를 들면 한국과 같이 기후의 변화나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며, 자연재해가 비교적 적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연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되지만, 만약 시도 때도 없이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며, 변덕스러운 기후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 또는 미래에 대한 믿음 갖기 어려울 것이다. 항상 언제 땅떵어리가 갈라지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 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 우환의식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우환의식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 성악설이다.
  성악설적인 입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람들 간에도 서로 믿지 못한다. 항상 상대방에 대해 의심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의심이란 할수록 불어나고, 욕심이란 끝까지 채울 수 없는 것이므로 결국에는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사회는 혼란해지고, 전쟁과 도탄에 빠지게 되는데, 순자가 살았던 전국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순자는 당시의 사회현상을 바라보며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고 결론을 내리고 사람들을 본성대로 행하게 내버려두면 결국 인류는 멸망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강력한 법과 예절을 재정해서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인류 멸망을 막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악설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법과 규칙이 엄격하고, 준법정신이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의 규치이나 법 위반이 인류사회를 명망시킬 것이라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의 사람들은 법과 예절을 잘 지키므로 외형적으로는 부드럽게 보이지만, 규칙을 어기거나 예절을 지키지 않을 때는 단호한 조치가 내려진다. 따라서 아예 규칙이나 약속을 어기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곤괘의 초육은 바로 이러한 성악설이 지배하는 집단에 처음 들어가는 경우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 만약 그 집단의 구성원들의 부드러운 걷모습만을 보고 안이하게 대처하여 규칙을 어기면 그 사회에서 도태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을 '서리를 밟으면 딱딱한 얼음이 이른다'고 표현한 것이다.

  六二 直方大 不習이라도 无不利하니라

 六二는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다.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

 

   주역의 괘에서 각 효의 자리 중에 홀수의 자리 즉 一, 三, 五의 자리는 양의 자리이며, 짝수의 자리, 즉 二, 四, 六의 자리는 짝수의 자리이다. 따라서 二는 음의 자리이면서 하체(下體-아래의 삼획괘)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곤괘의 육이는 음효(陰爻)가 하체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곧고 방정하다(直方)"고 했다. 즉 直은 바른 위치에 있음(음효가 음의 자이에 처함)을 말한 것이고, 方은 그 의리(중정의 자리에 처함)를 말한 것이다. 또한 육이는 直, 方, 大 세 가지로써 坤의 덕과 쓰임을 형용한 것이니, 땅의 道를 다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익히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니, 坤道에 있어서는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이며, 聖人에게 있어서는 조용히 道에 적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가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면 敬과 義가 확립되어 德이 외롭지 않게 된다. 곧고 방정하고 위대하기 대문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익히지 않더라도 이롭지 않음이 없음은 그 행하는 바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유순하고 正固함은 坤의 곧음이며, 형체를 부여함에 일정함이 있는 것은 坤의 방정함이며, 德이 无疆에 합하는 것은 坤의 위대함이다. 육이효는 유순하며 中正하고 또 坤道의 순수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德이 안은 곧고 밖은 방정하며 또 성대하여 굳이 배워 익히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점치는 자가 이러한 德이 있으면 그 점이 이와 같은 것이다.
  또한 육이는 성악설적 사고를 바탕으로하는 사회에 적응을 하고 안정을 취하는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성악설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를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강력한 법과 예, 규칙 등이다. 인간의 모든 생활이 이러한 규칙으로만 이루어지는 사회에 처음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건괘의 성격이 강한 한국 사람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한국사람은 법 보다는 의리를 중시하고 '마음'을 중시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仁人君子를 이야기할 때 '준법정신이 강한사람'을 운운하기 보다는 '법 없이도 살사람'을 운운하고, 오히려 사람관계를 끊는 극단적인 경우에 법을 찾기도 한다. "에이 X팔...... 법대로 해!". 법을 찾거나 규칙을 찾으면 오히려 인간미 없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까지 한다. 따라서 이러한 건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 법과 규칙을 중시하는 곤괘적인 집단에 적응하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간혹 규칙과 예절, 법 등을 잘 지키지 못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도태되고 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가 예와 규칙, 법일 경우에 그 사회에 처음 적응하기가 어려운 일이지 일단 적응하게 되면 오히려 마음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회보다는 살아가기 쉽다. 예와 법, 규칙 등은 일정한 度數가 있고, 조례와 판례에 따라 살아가면 그만이다. 남의 눈치 볼 필요없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 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 나의 행동이 항상 정직하고, 방정하며, 그 집단이 정해놓은 규칙에 익숙하다면 이젠 더 이상 이러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익히지 않아도 불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일단 그 사회의 예와 규칙을 잘 지켜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면 같은 집단의 동료로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육이는 하층부의 중심으로 조직사회로 본다면 한 조직의 실무를 전제적을 총괄하는 핵심 중견사원에 해당한다. 이 경우는 이미 그 조직의 구성 원리 및 특성, 조직의 내규, 조직을 올바로 이끌어나가기 위한 모든 원칙을 완벽하게 익힌 상태이고, 또한 상층부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받기 때문에 정직하고 방정한 인품을 유지하면서 소신대로 대담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좋다. 신뢰를 받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미 배운 규칙와 예를 익히고 실습하는 등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음의 성격으로 인해 조직의 다른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사를 잘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육이의 입장에 처한 사람은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땅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이는 소신을 가지고 자기가 터득한 규칙이나 예를 방정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다.

 

六三 含章1)可貞이니 或從王1)하여 无成1)有終이니라
(本義) 含章可貞이나 或從王事하면 无成有終하리라

六三은 아름다움을 머금음이 貞할 수 있으니, 혹 王事에 종사하여 이룸이 없고 끝마침을 두어야 한다.
(본의) 아름다움을 머금음이 貞할 수 있으나, 혹 王事에 종사하면 이룸은 없어도 종말은 있을 것이다.

1) 章 : 彰과 같은 의미. 밝을 장. 여기에서는 아름다움이라고 해석했는데, 좋은 능력을 의미한다.
2) 王 : 여기에서는 곤괘 전체의 중심인 六五를 의미한다.
3) 成 : 자기의 공을 이룸. 이루어진 공을 자기의 성과로 돌림.

六三은 하층부의 마지막으로 높게 드러난 자리로서,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이 밝아 상층부로 진입할 시기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하층부를 떠난 것은 아니다. 인생으로보면 30세 전후이며, 직장에서는 이사로 진입하기 전 단계, 군대로 보면 별을 달기 직전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악설적인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간에 서로 믿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동반자적인 관계 보다는 항상 경쟁관계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지나치게 튀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게 되면 지금까지 쌓아온 덕이 밖으로 드러나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도 하겠지만, 반대로 이 시기에는 주변으로부터 수많은 경쟁자가 생겨나게 되며, 시기와 질투, 견재도 많이 받게 되므로 위태로운 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자칫 방심하면 경쟁자에게 밀려날 수도 있고, 위기의식을 느낀 상층부에 의해 뜻하지 않은 좌절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자기가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내면으로 숨기고 貞固함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육삼은 규칙을 지키고 예를 지키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집단에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므로 아무리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정고함을 지킨다 하더라도 이미 상층부에서는 그의 능력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아름다움을 머금고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머금어 貞할 수 있으나 때에 따라 능력을 발휘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육삼은 혹 때로 나와서 윗사람의 일에 종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윗사람이 어떤 일을 하거나 하층부를 지도함에 있어 유능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육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이다. 이 때 육삼은 어떤 일에 있어서 훌륭한 성과를 이룰 수 있지만 그 공을 자기가 차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성악설적 이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육삼의 위치에 처한 사람이 윗사람이 시킨일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잘 처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성과를 육삼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하면, 윗 사람은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되고, 더구나 자기 자리에대한 위협까지 느껴, 결국에는 견제와 좌절을 당하게 되는 수가 생긴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할 경우에는 때에 따라 능력을 발휘하고 다만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으면 된다. 육삼의 도리는 아름다움을 머금었지만 참고 견디다가 때가 왔을 때 능력을 발휘할 것이며, 마땅히 그 공과 잘한 것은 자신이 차지하려하지 말고, 군주(육오-왕)에게 돌려야 떳떳하여 正道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 아름다운 능력을 머금고 감추어 끝내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六四1)2)이면 无咎 无譽리라
 
(本義)括囊이니

六四는 자루를 꽉 묶으면 허물이 없고 명예로움도 없을 것이다.
 
(본의) 자루를 꽉 묶는 것이니,

1) 括 : 맺을 괄, 묶을 괄.
2) 囊 : 주머니 낭, 자루 낭.

 

   六四는 군주(六五)와 가까운 자링에 있지만 서로 맞는 뜻이 없으므로, 上下가 막혀 있는 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때에는 正道로써 자처함은 위태롭고 의심받을 수 있는 처지이다. 만약 그 지혜를 감추어 주머니끈을 묶듯이 하여 드러내지 않는다면 허물이 없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해로움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감추어 숨는다면 역시 명예도 없을 것이다. '括囊'이란 자루나 주머니의 입구를 묶어 내용물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함을 말한다. 따라서 "주머니끈을 묶듯이 하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행동거지를 신중하여 해를 당하지 않음을 이른다. 六四爻는 음효가 음의 자리에 있지만 中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象과 占이 이와 같으니, 혹 일을 마땅히 감가고 은밀히 해야 하거나 혹 때가 은둔할 때임을 만난 경우이다.
  한편 육사는 건괘 구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하층부를 지나 상층부에 막 진입을 하는 단계, 혹은 질적인 비약의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회사로 치면 이제 막 이사진으로 승진한 경우이며, 군대로 치면 에제 막 별을 단 경우이다. 비행기로 치면 이제 막 이륙해서 궤도에 진입할 단계이거나, 착륙을 시도하는 단계다. 이륙하기 직전과 수평을 유지할 때, 착륙을 시도할 때 비행기는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하층부의 윗자리인 구삼의 위치에 있을 때 상층부로 진입하기 위하여 전력질주를 하여 이제 겨우 상층부로 진입한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대체로 이제 모든 것이 끝났고, 세상이 온통 내것만 같아 자신을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심리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 곤괘는 건괘와는 달리 음으로만 구성되어있는 괘이며, 사회로 치면 성악설적인 구성원들로만 구성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성악설이 지배적인 사회의 구성원들은 겉으로는 유순하고 부드러워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엄격하며, 분별하고 따지기 좋아할 분 아니라, 몸을 중시하고 물질을 중시하고 힘과 권력을 중시하며, 속이 음흉하여 남을 잘 믿지 않고 의심을 잘한다. 따라서 음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게 되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사기 쉽다. 이는 미약하긴 하지만 건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정치권에서 행해지는 행태를 보면 특히 야당의 견제를 받는 것은 권력의 핵심부 내지는 최 측근이다. 작금의 정치 행태에서도 보면 야당은 집권당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정권을 탈환하기 위한 방편으로 건전한 정책 대결이나 민생안정을 통한 권력집권의 방법 보다는 집권당에 대한 흠집내기 등을 통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으려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권력 핵심부의 측근인사에 대한 흠집내기이다. 곤괘에 있어서는 육사가 가장 통치권자(육오)에 가까운 자리이다. 따라서 육사는 언제나 의심과 감시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육사의 입장이 되면 최고로 출새했다고 우쭐해하거나 경거망동해서는 않된다. 어느때 보다 특히 조심하고, 행동거지를 삼가며, 분수를 지키고 말조심해야 된다. 권력의 핵심부에 근접했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모든 일에 소홀하게 되면 언제 어느때 공격을 당하게 될지 모르며, 일단 공격의 대상이 되면 집권자(육오)로부터도 의심을 받게 되고 결국은 제거당하게 된다. 따라서 이 때에는 자신이 아무리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자기의 주장을 삼가며, 집단의 중심역할을 하는 사람(통치자, 군주, 사장, 대장 등)을 보좌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머니나 자루 속의 내용물이이 새나오지 않도록 입구를 끈으로 꽉 묶듯이 속 마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막고, 행동 거지를 삼가 조심해서 몸을 단정히 하여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명예를 얻을 일도 없겠지만, 허물을 받지 않아 해롭지 않을 수 있다.

 

 六五 黃裳1)이면 元吉이리라
 (本義) 黃裳이니 元吉하니라

六五는 황색 치마처럼 하면 크게 선하여 길하리라.
(
본의) 황색 치마이니, 크게 길하다.

1) 黃裳 : 黃은 노란 색인데, 노란 색은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므로 黃은 중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裳은 치마로서 아래를 꾸     미는 것이다. 저고리가 웃옷이므로 화려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치마는 아랫도리이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다. 따라서 치마를 입는다는 말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는 말이 된다.

  六五爻가 음으로써 존귀한 자리에 거하여 中順한 덕이 내면에 충적되어서 외면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 象이 이와 같고 그 占이 크게 善하여 길함이 되니, 점치는 자의 덕이 반드시 이와 같으면 그 占 또한 이러할 것이다. {春秋傳}에 남괴(南 )는 춘추시대 魯나라 사람으로 季氏의 사음은 費땅의 邑宰였는데, 季平子가 大夫가 되어 예우하지 않자 장차 費땅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려 할 적에 점을 쳐서 이 爻를 얻고는 "크게 길하다"고 하니, 子服惠伯이 말하기를 "忠信의 일이라면 괜찮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패한다. 밖은 강하고 안은 온순한 것이 忠이요, 和로써 貞을 따름이 信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黃裳元吉'이라고 하였으니, 黃은 중앙의 색이요, 치마는 아래의 꾸밈이요, 元은 善의 으뜸이다. 中心이 不忠하면 그 색을 얻지 못한 것이요, 아랫사람이 공손하지 않으면 그 꾸밈을 얻지 못한 것이요, 일이 善하지 않으면 그 極을 얻지 못한 것이다. 또 무릇 易은 험한 것을 점쳐서는 안되는데, 세 가지가 결함이 있으니, 占이 비록 이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안된다"고 하였는데, 뒤에 남괴는 費땅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齊나라로 도망하였으니, 여기에서 점치는 법을 볼 수 있다.
  육오는 성악설적인 사고가 지배적인 사회집단에서 우두머리에 처한 경우이다. 그리고 곤괘는 모두 음효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악설적인 사회가 지배적인 사회의 구성원이나, 음효의 성격은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쉽게 남 앞에 나서거나, 행동을 앞세우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음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물질적인 가치와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혼란해지기 쉽고, 투쟁이 자주 일어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혼란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법과 예, 규칙등을 만들어 엄격히 적용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과 규칙을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기관이 요청되기도 하고 실제로 강력한 정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과거 일본의 왕정이 그렇다. 과거 일본은 왕권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왕을 신격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악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신격화된 왕이라 하더라도 쉽게 자기를 드러내거나 남앞에 나서서는 안된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판에 왕이라고 해서 가벼이 처신했다가는 망신당하기 일수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는 왕 역시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베일에 감추어 신성성을 계속 유지하여야 한다. 어떤 의견이나 정책도 직접 제시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자기의 의견을 직접 제시했다가 실패하게 될 경우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이 있더라도 그것을 자기가 집적 시행할 것이 아니라, 주변이나 측근, 총리를 시켜 집행하도록 하면, 그 결과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 직접적인 책임은, 실제로 일을 담당한 아랫 사람들에게 돌아가므로 자신의 권위에는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 있다. 일본의 정치제도가 바로 그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잘못된 정치의 책임은 내각수상이 지기 때문에 왕은 한 번도 문책당하는 일이 없다. 심지어 이차세계대전의 전범국이면서도 왕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신하들이 모든 책임을 떠맡았기 때문이다. 곤괘 육오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일러 황색 치마를 입는 것이라고 했다. 황색은 중중앙을 상징하는 색이고, 裳은 치마로서 아래를 꾸미는 것이다. 저고리가 웃옷이므로 화려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치마는 아랫도리이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다. 따라서 치마를 입는다는 말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감춘다는 말이 되고, 또 중도를 지키고 겸손하게 아래에 거처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만 하면 일본의 왕처럼 이차세계대전의 전범이면서 제판받지 않고, 패전의 군주이면서 교체되는 일이 없듯이 계속 권좌에 머물 수 있으므로 크게 길하다고 한 것이다.

  

上六 龍戰于野하니 其血 玄黃이로다

上六은 龍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

  上은 가장 위에 있는 한 爻의 명칭이다.
  陰은 陽을 따르는 자이다. 그러나 음의 盛함이 극에 달하면 양이 없는 것에 싫증을 느껴 반드시 서로 항거하여 다툰다. 그리고 또한 上六은 곤괘에서도 이미 극에 있으니, 다시 나아가 그치지 않으면 음이 양에게 비견되어 반드시 陽과 싸우게된다. 그러므로 들에서 싸운다고 말하였는데, 용들이 들에서 싸우는 것은 그 道가 궁하기 때문이다. 들은 나아가 밖에 이름을 말한다. 이미 陽과 대적하면 반드시 음과 양이 모두 패하고 상하니 그 처참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피가 검고 누르다고 한 것이니 점치는 자가 이와 같으면 그 흉함을 알 수 있다.
  한편 上六는 건괘의 상구와 마찬가지로 인생으로 치면 이미 60을 넘어선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군대로 치면 이미 갈참이 된 말년 병장과 같은 시기로, 인간의 사회 집단에서 보면 아무런 실권 없이 중심의 위치에서 벗어난 형상이다. 그런데 곤괘는 음의 요소로만 구성되어있고, 음의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이다. 따라서 곤괘의 상육은 음의 요소, 또는 성악설적 사고가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에서 한 평생을 살아서 노년기에 이른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음의 요솔만 구성된 사회, 즉 순자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회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믿기 때문에 인간의 자율적인 능력에 따른 사회에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존재이며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서로 다투다가 결국 멸명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순자적 사고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결말을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법이나 규칙, 예절 등을 제정해서 인간의 행동을 철저히 규제하며, 또한 그 구성원들 역시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안정을 위한 법과 예절의 준수를 중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는 외견상 매우 질서있고 조화로우며 안정된 사회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안정은 인간의 자율적인 삶의 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또 이러한 사회에서의 삶이란 대체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라기 보다는 남을 위한 배려, 혹은 남의 눈치를 보는 삶이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자기의 정신적 만족, 인간적 이상의 실현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순자의 사상에 기초하여 일평생을 살게 되면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회고해 보면 결국엔 열심히 법과 예절, 규칙을 지킨 것 이 외에는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허무함을 느끼기 쉽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싶어진다. 이러한 경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다는 것은 작게는 지금까지의 자기의 삶의 방식을 바꾼다고 할 수 있겠지만 크게는 기존의 질서나 사회제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여성들이 남편의 정년을 맞아 퇴직금 일체를 위자료로 챙기고 이혼하는 사례가 많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며, 근래에 늘어나고 있는 황혼이혼이 이러한 현상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음이란 원래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하며 계산적이다. 따라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과감하거나 대담스럽지 못하고, 무모하거나 섣부르지도 않다. 하지만 음이 盛하여 극에 달하고, 음이 음으로서 살아온 것에 염증을 느껴 음으로서의 유순함과 그 도리를 지키지 않게 되면 일견 陽과 같은 대담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의 음을 양에 비견된다고 하였고 또 龍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음은 양이 아니고, 외형적으로 양처럼 행동한다해도 음은 여전히 내면에 남에 대한  불신과 경쟁심, 음흉함이 있기 때문에 투쟁을 일삼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 의견대립이나 갈등으로 인한 다툼이 일어나게 되면 체면과 예절을 일체 무시하기 때문에 처참한 전투로 비화되기 쉽다. 이러한 상황을 上六에서는 "龍이 들에서 싸운다"고 표현하였다. 들이란 대규모의 전쟁이 가능하고 또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는 공공연한 장소이다. 그리고 "용이 들에서 싸우므로 그 피가 검고 누렇다"고 했는데, 검은 것은 하늘의 색이고 누렇다는 것은 땅의 색이다. 따라서 "그 피가 검고 누렇다"는 것은 피가 흘러 가득차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대규모의 전쟁이 공공연히 처참하게 진행되어 음과 양이 모두 패하고 마는 엄청한 유혈사태가 벌어짐을 표현한 것이다. 결국 인간의 본질을 물질적으로 파악하는 순자적 사고방식은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인간의 목숨을 부지하고, 사회를 유지시키기위한 수단으로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일단 사회가 안정되고, 인간의 삶이 하루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좀 더 고차원적인 정신세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추구하게 되면 순자의 사상은 그 한계에 달하게 된다. 순자의 철학사상에 의하면 인간존재란 몸과 정신이 서로 분리되어있고, 정신 역시 몸을 이루고있는 물질의 작용에 의한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죽고나면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는 허망한 존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이 오래 지속되면 인간은 결국 정신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허망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쾌락주의에 빠져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규칙과 법, 예절 등은 무용지물이되고,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나오더라도 그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며, 서로 저마다 잘났다고 치열하게 주도권 다툼을 하다가 결국은 모두 멸망하게 되고 만다.

用六 利永貞하니라

六을 쓰는 경우는 영구(永久)하고 정고(貞固)함이 이롭다.

주역 64괘는 모두 괘사와 효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직 건괘와 곤괘에만 효사 외에 用九(건괘의 경우)와 用六(곤괘의 경우)이라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다. 用九를 쓴 건괘는 유일하게 여섯효 모두가 양인 경우이고 用六을 쓴 경우는 유일하게 여섯효 모두가 음인 경우이다. 用九는 건괘에서 여섯 효를 설명한 뒤, 다시 여섯 효사에 대한 총괄적인 설명을 더한 것이고, 用六은 곤괘에서 여섯 효를 설명한 뒤, 다시 여섯 효사를 총괄하여 설명한 것이다.
  주자는 『주역본의』에서 점괘를 뽑았을 때, 여섯 효 모두 노양이 나왔을 경우 用九의 내용으로 점을 치고 여섯 효 모두 노음이 나왔을 경우 用六으로 점을 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尙秉和는, 여섯 효가 모두 변효일 경우 여섯 효 외에 용구나 용육을 보는 것이라면 나머지 62괘에서도 모두 변효일 경우에 대비해 이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고 하여,  주자의 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尙秉和의 설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용구와 용육을 쓴 것은 여섯 효가 모두 동일한 경우 그 동일한 것을 대표해서 부연설명한 것으로, 처음부터 점에 대비한 것이 아닌 듯하다. 오히려 양효로만 구성된 건괘의 경우, 양들만의 세계에서 원만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음의 성격을 발휘하는 것이니 곧 用九는 음의 성격을 대변한다. 따라서 건괘에서 여섯 효가 모두 변효가 되어 之卦로 갈 경우 곤괘가 되는데, 용구가 이미 음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곤괘의 성격과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之卦인 곤괘와 용구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지괘로 가지 않고 용구를 읽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실제로 『춘추좌전』을 보면 건이 곤으로 가는 점괘에서 [군룡을 보는 데 머리가 없으면 길하다]고 하여 용구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머리가 없으면 길하다는 말은 곤괘 괘사의 '먼저 하면 혼미하고 나중에 하면 길하다'와 같은 내용이다. 곤괘의 경우도 대체로 마찬가지이다.
  陰의 道는 유순하여 일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六을 쓰는 방법은 이로움이 항상하고 오래하며 정고(貞固)함에 있는데, 이는 점치는 자가 이러한 상과 효를 얻었을 때, 즉 육을 쓰는 상태에서 종말을 성대히 하기 위해서는 길이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음의 성격은 유순하고, 계산적이고 치밀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잘 세우며, 속 마음을 밖으로 잘 표현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으며, 이익을 따짐으로인해 유종의 미를 장식하기 어렵다. 따라서 陰이 이미 정고함이 부족하면 종말을 성대히 하지 못한다. 모든 효가 음으로 구성된 상태, 즉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성악설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현실적인 요소들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참고 견디며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한다. 이러한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매사를 짧은 시간 안에 "빨리 빨리"이루고자 하거나, 대중대충 처리하면서 이익을 얻으려면 결국에는 낭패를 보기 쉽다.

   산업혁명이후 지금까지의 세계를 이끌어온 주된 사상은 서양의 근대분화를 바탕으로한 합리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전통적인 동양의 철학체계로 분석해본다면 동양철학의 주된 범주 가운데 하나인 인성론체계 중의 성악설과 성선설 중 순자의 성악설사상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순자철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의 특징은 합리적이며 물질적 가치가 중시되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며, 규칙과, 질서, 법과 예절이 주도적인 사회유지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순자의 철학이 지배적인 사회는 개인이나 집단, 국가를 막론하고 가장 우선적인 가치를 자기 이익을 위한 실리추구에 둔다. 물론 이 경제적 실리 위주의 가치관은 과학기술의 경쟁적 발전을 가져왔고 그 결과 물질산업문명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는 과학문명을 그 특징으로 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과학문명이 오늘날 인류에게 공헌한 바는 많은 방면에 있어 참으로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위대한 문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爛熟하게 되면 그 자체 내에 모순을 갖기도 하는데, 과학문명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새로운 즈믄해를 열어가는 현 시점에서도 우리는 고도의 과학문명에서 오는 세기말적 폐단의 현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현대의 과학 기술은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 준 긍정적 면이 있는가 하면, 인간생활의 편의를 위한 방편이어야 할 과학이 그 지나친 비대화와 철학적 가치의 부재로 인하여 인간이 도리어 과학에 예속되기도 하는 부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윤택해야 할 인간생활이 무의미한 기계의 작동처럼 변해 가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은 그와 비례하여 퇴폐, 향락 풍조를 일으켜 도덕성의 타락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생활은 그만큼 저질화 되었고 인간은 물질적 만족과 퇴폐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노예처럼 되어 가고 있다. 여기에 또 인간이 인간의 본래적인 고귀함을 상실하는 인간소외, 생명경시풍조 마저 가져오게 되었다. 이 밖에도 과학 기술문명의 이기로 인한 공간적 단축을 통한 급속한 문화접변과 문화충돌 현상은 각 지역의 전통적 신앙, 전통적 윤리에 강력한 충격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한 문명을 말살시킴으로써 그 전통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오늘날 이 지구상의 인간들이 뚜렷한 가치의 기준이 없이 정신적으로 크게 방황하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작게는 인간 개개인의 자아상실로부터, 크게는 인류의 생존자체에 대한 위협에 이르기까지, 이미 한 국가, 한 민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문제이며, 전 인류의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가 직면한 문제들은 본질적이며 복합적이며 세계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복잡한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로 일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사유의 세계가 아니라, 사회적 윤리적 본질문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해답이며, 과거와 현실에 대한 철저한 해석을 하고, 미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구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문명의 위와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서구적 가치관이나 철학만으로는 치유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오히려 문화생리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문화에서 그 처방을 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서구 세계의 물질 문명을 이끌어 온 이성주의 및 합리주의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이를 대신할 새로운 철학적 대안을 찾는데 주목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동양의 전통적 사유 체계이다. 흔히 현대의 문제점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화, 정신과 물질의 이원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만큼, 이것들을 하나의 체계 속으로 환원시키는 동양적 사유방식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동양사상에 대한 재 음미가 요구되는 까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