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庸

第一章

02-01

仲尼1)曰 君子 中庸하고 小人 反中庸하니라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대로 한다.

1) 仲尼(중니) : 공자(孔子)의 자(仔). 공자는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가 이름과 자를 지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의 어머니인 안징재(安徵在)가 공자의 이름과 자를 짓게 되었는데, 안징재는 공자를 잉태하였을 때 尼丘山에서 100일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해서 안징재는 니구산의 구(丘)자를 따와 공자의 이름을 ‘구’라 하고, 나머지 니(尼)자를 자(字)에 사용했는데, 공자의 자가 중니(仲尼)인 것을 보면 공자는 공씨(孔氏) 집안의 둘째 아들임을 알 수 있다. 자를 지음에 있어 일반적으로 맏아들일 경우에는 ‘伯’, 혹은 ‘孟’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고, 둘째일 경우에는 주로 ‘仲’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밑으로 叔, 季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중용(中庸)이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어 평상(平常)한 이치이니, 바로 천명의 당연함과 정미함의 극치이다. 그런데 천명이란 아무나 인식할 수 있고, 천명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도 15세에 비로소 올바른 학문다운 학문에 뜻을 두고 50세가 되었을 때에야 천명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따라서 천명이란 학식과 덕행이 두루 겸비된 자라야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천명에 따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군자만이 이것을 체득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인들의 삶은 대체로 개인의 영달과 사리사욕을 체우기 위해 급급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소인들의 삶은 언제나 중용을 행하고자 하여도 오히려 중용에 반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02-02

君子之1)中庸也 君子而時中2)이요 小人之中庸也3)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로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

 

1) 之 : 주격조사. ∼이, ∼가, ∼는(은).
2) 中 : 적중하다. 맞다.
3) 小人之中用也 : 이 부분은 왕숙의 판본에는 ‘小人之反中庸也’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옳을 듣하다. 글자 그대로 하면   소인이 중용을 한다는 말인데, 이미 중용을 한다고 하면 이는 이미 소인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왕숙의 판본   대로 소인이 중요에 반대로 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타당하다.

 군자는 스스로 군자의 덕을 갖추고 있으며, 또 능히 때에 따라 중도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용을 행할 수 있지만, 소인은 소인배의 마음이 있고 또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중용에 반대로 하게 된다. 중(中)은 일정하게 고정된 실체가 없이 때에 따라 있는데, 이것이 바로 평상의 이치이다. 군자는 이것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능히 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듯지 않을 때에도 두려워하여 때마다 중도에 맞지 않음이 없고, 소인은 이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망령되이 행하여 꺼리는는 바가 업다.

03-01

 

子曰 中庸其至矣乎1)인저 民鮮能 久矣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은 그 지극할 것이다. 사람들이 능한 이가 적은 지가 오래이다.”

1) 矣乎 : ∼일 것이다. 추측형 종결어미

 

중용(中庸)이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치면하면 중(中)을 잃고, 미치지 못하면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직 中庸의 德이 지극함이 된다. 그러나 중용의 덕은 또한 사람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똑같이 부여 받은 것이므로 애당초 어려운 일이 아닌데, 사람들은 모두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에 마음이 어두워져 자신의 이익, 혹은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여 중용의 덕을 능히 행하는 사람들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능한 이가 적은 지가 이제 이미 오래된 것이다. 이 구절은 『논어』「옹야」에도 보이는데, 『논어』에는 能字가 없다.

 04-01

曰 道之1)不行也 我知之2)로니 知者 過之하고 愚者 不及也일새니라 道之1)不明也 我知之2)로니 賢者 過之하고 不肖者 不及也일새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알았으니,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알았으니 어진자는 지나치고 어질지 못한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1) 之 : 주격조사.
2) 之 : 대명사.

도가 행해진다는 말은 곧 중용의 덕이 행해진다는 말이다. 중용의 덕이란 사람이나 사물이 처음 생겨날 때 하늘로부터 똑 같이 부여받은 이치이다. 이 이치가 사물의 본질로서 내재되어 있을 때는 그냥 이(理)라고 하지만, 이것이 사람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때에는 특별히 ‘성(性)’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나왔지만 성(性)이란 곧 천명(天命)을 의미하며, 천명은 순수 지선하며 조금도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만물의 존재 원리이며, 본질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똑같이 이 천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본성은 다 완전무결하고, 순선무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나 사물의 형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기(氣)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 기에는 선악(善惡), 청탁(淸濁), 수박(秀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사람의 본성은 누구나 같지만 바로 이 기의 차이에 따라 知者와 賢者, 愚者와 不肖者가 있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중용의 도를 행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지혜로운 자는 앎이 지나쳐 이미 道를 족히 행할 것이 없다 하고, 어리석은 자는 앎에 미치지 못하고 또 행할 바를 알지 못하는데, 이것이 도가 항상 행해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또한 도를 알지 못하고 어질기만 한 사람은 언제나 行이 지나쳐 이미 道를 족히 알 것이 없다 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行에 미치지 못하고 또 알 바를 구하지 않으니, 이것이 道가 항상 밝아지지 못하는 가닭이다.

04-02

人莫不1)飮食也언마는 鮮能知味也니라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지 않는 이가 없건마는 맛을 아는 이는 적다.

1) 莫不 : ∼아님이 없다. 이중부정

음식이란 사람이 육체적으로 살기위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 맛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드믈다. 음식이 맛을 가지고 있고, 또 인간이 맛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먹히기 위한 것이고 또 먹기 위해서이다. 생태개가 유지 되는 이유도 대개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자연 상태의 나무 열매가 맛을 가지고 있고 화려한 색과 향기를 갖는 이유는 자기를 먹어줄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서이다. 나무 열매는 짐승에게 먹히고 씨는 배설물과 함깨 배출되어 또다른 자기 개체를 번식시키게 된다. 전혀 맛을 느낄 수 없다던가, 아니면 맛이 없다면 먹지 않고 먹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맛이란 본래 이러한 이유에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누구나 음식을 먹고 마시지만 이러한 맛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삶을 유지하기위한 필수 조건으로 음식이 맛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단지 음식의 맛 자체에만 매료되어 지나치게 먹는다던가 아니면 원하는 맛이 아니라고 해서 음식을 거부한다. 그 결과 사람은 여러 가지 성인병을 갖게 되거나 영양실조에 걸리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먹거나 마시지 않는 경우가 없지만 맛을 아는 자가 드물다는 말이다.

道 역시 마찬가지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도란 잠시라도 사람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과 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닌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도에 따라서 살고 도와 더불어 살고 도를 행하면 사는데,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 드믈다. 이는 도가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도를 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게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도를 살필 것인가? 道를 알려면 우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자연을 보라.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런데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 길(道)을 가고, 조금도 나태하거나 속임수가 없다. 오직 인간만이 기질의 욕심에 가려져 자기의 자연성을 잃고 도에서 멀어지고 결국은 도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자연이 운행하는 모습, 자연이 존재하고 있는 본래의 모습이 바로 도이며,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인간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 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성실함(誠)이다. 성실함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다.(誠者天之道) 그런데 인간은 기질적 욕심이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성실함 그 자체를 유지하기 힘들다. 따라서 인간이 바로 자기의 본래성을 찾고 자연의 본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닮으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성실해지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도인 것이다.(誠之者人之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