童 蒙 先 習

 

首 篇

君臣 天地之分1)이라 尊且貴焉2)하며 卑且賤焉하니 尊貴之3)使卑賤 卑賤之3)事尊貴 天地之4)常經5)이며 古今之4)通義6)

임금과 신하는 하늘과 땅의 분별이다. 임금은 높고 귀하며 신하는 낮고 천하니 존귀한 이가 비천한 이를 부리고 비천한 이가 존귀한 이를 섬기는 것은 천지간의 어디에나 통용되는 도리이며 예나 지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의리이다.

1)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는 하늘과 땅 같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관계라는 말이다. 天地之分에서 之는 天地가 分을 꾸며주    도록 하는 관형격 어미(∼의, 또는 ∼하는) 구실을 한다.
2) 尊且貴焉 : 尊은 지위가 높다는 뜻이고, 貴는 흔하지 않다는 뜻으로 모두 가치가 높다는 뜻으로 쓰였다. 且는 부사어로     ‘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焉은 종결사.
3) 之 : 주격조사.
4) 之 : 관형격 어미.
5) 常經 : 불변의 도리
6) 通儀 : 보편적인 규범.

 

 이 부분은 봉건 사회의 신분질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과거 봉건 사회는 무엇보다 신분질서가 그 사회를 유지하는 최고의 원동력 중에 하나였는데, 이러한 신분질서는 특히 계급적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사회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한 계급적 질서의 타당성을 옹호하고 있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는 마치 하늘과 땅과 같이 명확히 구분되는 관계로서 임금이 높고 귀한 존재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하가 낮고 천하다는 말 역시 사회적으로 가치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존귀한 사람이 비천한 사람을 부린다는 말은 곧 임금이 신하를 부린다는 것이며, 비천한 사람이 존귀한 사람을 섬긴다는 말은 신하가 임금을 섬긴다는 말로서, 이러한 군신 상하의 도리는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불변의 원칙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얼핏 보면 절대 군주의 통치권을 지나치게 강화시키고, 신하는 임금의 명령에 무조건 적으로 복종하기만 해야하는 일방적인 군신관계를 강조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그렇지 많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무리 군주 중심의 봉건시대였다 할지라도 신하는 임금의 통지를 보좌하면서 적극적으로 임금의 실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하상을 강조함으로써 권력의 독주를 견제하는 신하의 역할 역시 강조되었다.

是故1) 君者 體元2)而發號施令者也 臣者 調元而陳善閉邪者也 會遇之際 各盡其道하여 同寅協恭하여 以臻3)至治4)하나니

이 때문에 임금은 원(元)의 도리를 체행(體行)하여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고 신하는 임금을 도와 착한 일을 아뢰고 부정한 일을 막는 존재이다. 임금과 신하가 만날 때에 각각 자신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함께 공경하여 지극한 정치를 이루어야 한다.

1) 是故 : 이 때문에. 따라서. 그러므로.
2) 體元 : 體는 몸소 체험하여 알게된다는 타동사로 쓰였으며, 元은 으뜸, 혹은 근본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여기서는 ‘임    금’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3) 臻 : 이르다. 미치다. 모이다. 음은 ‘진’.
4) 至治 : 지극한 정치라는 뜻으로 유교의 이상적인 정치를 의미하는데, 유교의 이상적인 정치는 지치구현된 시대인 요순   (堯舜) 시대의 정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서경(書經)』요전(堯典」을 보면, 요임금의 이상적인 정치행위를 말하기 전   에 그러한 정치행위가 가능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으로 요임금의 덕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처럼 군주의 도덕성을 정   치행 위의 근본적인 역량으로 설정하고, 그 도덕성의 확대를 곧 세계완성과 이상사회의 구현 단계로 보는 것이 유학적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임금과 신하의 도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대 봉건시대의 군신간의 관계는 혹 무조건적인 명령과 거기에 대한 복종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군신간의 도리는 그러하지 않다. 당시에는 임금은 모든 백성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스스로 인격을 닦아 임금의 도리를 다하여야 이에 백성의 모범이 되고 그렇게 될 때 다른 물리적인 힘이나 재도적인 장치를 가지고 백성을 억압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저절로 교화되어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신하 역시 무조건적인 충성이나 복종이 아니라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기초로하여 그러한 정치가 잘 베풀어질 수 있도록 임금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때로는 임금의 정책시행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임금을 충고하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부정한 일을 막기도 하여 훌륭한 정치가 시행될 수 있도록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임금과 신하가 모두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고 자신의 책임고 의무를 다 할 때 지극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或君而2)不能盡君道하며 臣而2)不能修臣職이면 不可與共治天下國家也니라 雖然3)이나 吾君不能 謂之賊이니

만약 혹시라도 임금이면서 임금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며 신하이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함께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 비록 그렇지만 우리 임금은 훌륭한 정치를 베풀 수 없다고 말하는 이를 임금을 해치는 자라고 하니

1) 苟 : 만일. 만약. 음은 ‘구’.
2) 而 : 접속사. 역접과 순접의 문장에 다 쓰인다.
          ex)   時習之면 不亦說乎아
                  배우고 (그리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그러나)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3) 雖然 : 비록 그렇지만.

임금과 신하 모두가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히 해야 함을 말한 부분이다. 천하 국가를 경영해 나아가는 것은 군주 한 사람 만의 몫도 아니며, 신하들 만의 일이다. 천하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지고 이상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임금은 스스로 임금의 도리를 체득하여 성군(聖君)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여야 하며, 신하 역시 신하의 도리를 다하여 최고의 이상국가를 이루기 위해 노려해야 한다. 그런데 간혹 임금이 패도하다던가 무능한 경우가 이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라 하더라도 신하된 입장에서는 자신의 임금이 무능하다고 해서 그냥 버려두어서는 안된다. 목숨을 걸고라도 임금을 바르게 보필하여 잘못된 일에서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임금이 훌륭한 정치를 하지 못한다고 말만해 버린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임금을 해치는 경우가 되고 만다.

昔者1)2)暴虐이어늘 比干3) 諫而死하니 忠臣之節 於斯盡矣로다 孔子曰 臣事君以忠4)이라하시니라

옛적에 상(商)나라 임금 주(紂)가 포학한 짓을 하자 비간(比干)이 간하다가 목숨을 잃었으니 충신의 절개가 여기서 극진했다. 공자께서는 신하는 임금을 충(忠)으로 섬겨야 한다고 하셨다.

1) 商 : 중국 고대의 왕조(?~BC 1100?). 원래 은(殷)이라고 하였으나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    ·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    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서, 적    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    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고 할 수가 있다.
2) 紂 : 주(?∼?). 중국 고대 은(殷)왕조 최후의 왕. 하(夏)의 걸왕(桀王)과 함께 걸주(桀紂)로 병칭되는 악덕천자(惡德天    子)의 대표적 존재이다. 본명은 제신(帝辛) 또는 수(受)이고, 주(紂)는 무도한 군주에게 주어진 시호이다. 『사기(史記)    』에 따르면 주왕은 변설(辯調)을 잘하고 힘도 세며 미녀와 음악을 즐겼다고 한다. 궁전과 정원을 호화롭게 장식하고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총비(寵妃) 달기(己)에게 매혹되어 충신들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간사한 무리들을 가까    이 하였다. 조세와 형벌을 가혹하게 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민심과 제후들의 마음은 은왕조를 이탈하여 당시 선    정 을 베풀어 한창 융성하고 있던 주(周)의 문왕(文王)에게로 쏠렸다. 은나라가 동이(東夷)의 정벌에 힘을 쏟고 있을 때    그 기회를 틈타 BC 1100년경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은 제후들과 군사를 일으켜 은왕조를 멸망시켰다.
3) 比干 : 비간(?∼?). 은의 마지막 왕인 주(紂)의 숙부(叔父). “신하된 사람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해야 하는 것이니 그렇    지 않으면 인민은 구제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에 주(紂)는 화가 나서 “성인(聖人)의 심장   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다.” 하고서 비간을 죽여 심장을 꺼내어 확인하였다고 한다.
4) 事君以忠 : 『논어(論語)』「八佾」에 보인다.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定公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며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孔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禮로써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성으로써 해야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하왕조는 중국 전토를 휩쓸었던 대홍수를 잘 다스렸고, 전국을 9개 주(州)로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禹)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다. 그로부터 17대째가 되는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왕조를 창설하였다고 한다. 이 탕왕으로부터 29대의 왕이 잇달아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에 사마 천(司馬遷)이 고대의 계보에 따라 ꡔ사기(史記)ꡕ「은보기(殷本紀)」속에 기술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소둔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갑골문자는 은왕조의 점술사가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점쳤던 것이었으며,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ꡔ사기ꡕ에 전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은왕조는 개조인 탕왕 이래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나 20대의 왕 반경(盤庚)이 은허로 옮긴 이후 31대의 주왕(紂王-帝辛)이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은허에 정주하였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각지에서 은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는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유적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허난성 이리두(二里頭)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이보다 앞선 허난성 신석기시대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아, 은대의 최전기(最前期)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하남성 중부에서 섬서성(陝西省)에 이르는 황하(黃河) 연변의 황토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중기의 유적 분포지역은 이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그 대표는 하남성 정주(鄭州)의 유적이다. 후기에 이르면 서쪽은 섬서성 기산현(岐山縣)에서 동쪽은 산동성(山東省)의 제남(濟南), 북쪽은 하북성(河北省)·산서성(山西省)에서 회하(淮河) 유역에 걸치는 화북평원의 거의 전부와 양자강(揚子江) 중류에까지 확대되었다. 요컨대 은허시대의 은문화는 이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왕조는 약 1,700 m의 토벽으로 둘러싸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하여 대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는 청동기·도기(陶器)·골기(骨器)를 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가 발굴되었다. 반경이 은허로 천도한 이후, 귀갑과 우골에 새겨진 점복문(占卜文), 즉 갑골문자의 기사(記事)와 궁전·묘능의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은의 여러 왕은 태행산맥(太行山脈)에서 동방으로 흘러가는 원하(洹河)의 굴곡진 지점에, 하안(河岸)의 단애(斷崖)를 북·동쪽으로 업고, 서쪽으로는 도랑을 파서 북서의 유목민에 대비하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소둔촌 북쪽의 대지 중앙에는 토단(土壇)을 쌓아 올려, 위에 종묘(宗廟)·궁전을 건축하였다. 제왕이 죽으면 그 시체는 원하강의 북안 후가장(侯家莊)의 지하 13 m에 200 m2 이상의 큰 널방(墓室)을 만들고, 생전에 애용했던 거대하고 정교한 청동기를 비롯하여, 옥기(玉器)·석기 등을 껴묻거리(副葬品)로 함께 매장하였다. 호화로운 청동기는 고대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이지만, 그보다도 이 널방의 안팎으로 산재해 있는 다수의 인골군(人骨群)이 고고학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은 소수의 시종(侍從)·시녀는 있지만 대부분은 병사(兵士)로서, 왕에게 순사(殉死)한 것이며, 그 수는 한 왕묘에 500명에서 1,000명에 달하였다. 은의 왕은 점복(占卜)으로 신의(神意)를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원수(元首)였다. 또한 이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나 병사로 삼았던 것 같다. 이민족 가운데 북서의 고방(苦方)·토방(土方)이라 불렸던 유목민이, 은허로 옮긴 당초의 무정왕시대(武丁王時代)의 강적이었다. 그리고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은왕조도 말기의 무을(武乙)·주왕의 시대에 이르자, 신의 은총을 받은 나머지 방자해져서 자신이 신과 똑같은 절대자라고 믿고 혹독한 전제군주로서 제후·백관·인민들에 대하여 잔혹한 압정을 가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회하강 유역의 인방(人方)이라고 하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의 국가를 정복하였다. 주왕이 전쟁에 국력을 다 써버린 틈을 타서 서방의 산시성에서 실력을 길러, 이 지방 제후의 인망을 얻고 있던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동진하여 화북평원으로 내려왔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더욱 동진하여 은나라 주왕의 대군을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무찌르고 은의 수도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대신하여 주왕조를 일으켰다.